효자 조완기와 조헌의 묘소
효자 조완기와 조헌의 묘소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1.28 2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조헌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는 이름난 효자였다. 조완기는 자신 어머니의 병환을 위해 정성으로 보살폈으나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헌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아들 조완기에게 할머니가 살아있었으므로 “손자인 너만은 싸움터에 나가지 말고 집안을 돌보라”며 말렸다. 하지만 조완기는 “할머니는 집안에서 계시면 되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전쟁터에서 누가 아버지를 돌봐 드리겠느냐”며 아버지와 함께 싸움터에 나아갔다. 그리고 빗발치는 화살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시중을 들며 싸움에 임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얼마 후 금산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색이 선명한 옷으로 갈아입어 자신이 의병장으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앞서 나아가 싸우다 결국 전사했다.

후율당 앞에 서 있는 충효각은 이와 같은 아버지 조헌의 충심과 아들 조완기의 효심을 후세들에게 전하고 있다.

한편 후율당이 있는 안내면과 이웃해 있는 안남면 도농리에는 충청북도기념물 제14호인 조헌 묘소가 있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조중봉 묘소라 되어 있다. `중봉(重峰)'은 조헌의 또 다른 호이다. 그리고 묘소 아래에는 조헌의 위패를 모신 사당 `표충사(表忠祠)'와 그의 업적을 전하기 위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문화재 안내판을 따라 조중봉 묘소와 표충사를 찾아가면 제일 먼저 길가에 서 있는 조헌 선생 신도비를 만나게 된다. 신도비는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록해 묘 입구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 신도비에는 선생의 생애가 적혀 있는데, 특히 마지막 격전지였던 금산 싸움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신도비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도비가 마주 보는 도로 건너편에 표충사가 자리 잡고 있다. 홍살문과 충의문 현판이 걸려 있는 솟을삼문을 지나면 표충사에 다다른다. 홍살문은 사악한 기운을 내쫓는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홍살문 안쪽은 깨끗하고 신성한 공간이 되는 셈이다. 솟을삼문은 가운데가 솟아있는 세 칸의 대문을 말하는데, 격식 높은 건물에 사용한다. 가운데 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라 평소에 닫아두었다가 제사를 올릴 때만 사용한다. 따라서 산 사람은 양쪽 문을 이용해서 드나드는 게 보통이다. 사당 안에는 조헌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이곳에서 해마다 중봉 충렬제를 열어 조헌 선생의 얼을 기리고 있다.

표충사의 오른쪽 위로 잘 자란 소나무 숲 속 돌계단을 오르면 충북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된 조헌의 묘소가 있다. 금산 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전사한 조헌의 유해는 그의 아우 조범과 제자들이 모셔와 후율당이 있는 안내면 도이리에 묻었다. 그 뒤 인조 14년(1636)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묘를 옮겨오면서 우암 송시열이 조헌의 공적을 기록해 묘비를 세웠는데 그 묘비가 지금도 묘 앞에 서 있다.

한반도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분단 70년의 불행한 역사가 끝장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드디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질 좋은 징조가 보인다. 이제 우리 역사에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찾아올 것 같다. 이러한 시기에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유적지로 답사를 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