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순재
배우 이순재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9.01.2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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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배우 이순재를 가리키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 뜻을 정하면 곧바로 간다는 `직진(直進)'입니다. 우리 나이로 86세를 맞은 그가 영화와 TV와 연극을 거침없이 오갈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직진의 간명한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 신년특집에서 만난 배우 이순재는 과연 직진이더군요. “배우는 부지런해야 한다. 연기는 몸 사리면 못해. 자꾸 움직여야 해. 나를 버리고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게 연기다. 힘들어도 이겨내야 한다. 살아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우리 작업은 해보는 방법밖에 없다.”

그의 말은 어떤 레토릭(rheto ric)처럼 길고 유려하진 않았지만, 백발백중으로 과녁에 꽂히는 화살과도 같았습니다.

학교 수업할 때 주로 `한국어 발음 소사전'을 가지고 다닌다는 배우 이순재는 우리말 발음이 쉽지 않다고 하면서, 말끝에 따로 힘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연극으로 옮긴 공연을 마치고는 어느 제자가 그를 놓고 배움은 끝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교수님이라고 말하던 장면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더군요.

주변의 평판 또한 대단했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내면의 열정이 넘치는 분이다.”( 배우 나문희) “재미있고, 대화할 때 거침없다. 그 많은 기억이 놀랍다.”(배우 이한위) “아, 내가 이분은 꼭 닮고 싶다. 강직함과 어떤 지적인 면, 검소함과 열심히 하시는 것, 항상 좌절하지 않으시는 모든 걸 존경한다.”( 배우 유승봉) “그에겐 이 길밖에 없다. 다른 것은 생각이 안 드나 보다.”(아내 최희정)

배우 이순재는 셰익스피어를 읊는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가 소름끼쳤다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명배우의 조건에 대해 말을 하고 싶지만 아끼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TV 드라마 `풍운(1982)'에서 흥선대원군을 맡아 만조백관(滿朝百官)을 앞에 두고 한 4분 이상 몰아치는 두 장짜리 연설문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담배를 끊었다는 배우 이순재. 자신에게 실수, 특별대우, 지각을 허용하지 않는 배우 이순재. 6개 정도의 다른 대본들로 가득한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동시진행의 스케줄을 감당해내고 있는 배우 이순재. 삶은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인생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배우 이순재.

배우 이순재는 대중문화를 다루는 저널리스트 김지수가 낸 인터뷰집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에서도 만나볼 수 있더군요.

“가난해도 자존감은 강한 영감이지. 연기는 상대를 위해 관객을 위해 내 욕심을 절제해야 해요. 재벌도 권력자도 아니지만, 무시당해도 흔들리지 않은 건 내가 하는 예술에 자부심이 있어서죠. 배역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그 자존심 하나로 살았지.”

“살아보니 인생이란 건 여러 욕심이 있겠지만, 조그만 손해는 감수하고 좀 모자란 듯 사는 게 좋아. 예술 장르는 끝도 완성도 없는 직진이에요. 자족하면 바로 정체지. 허허.”

살다 보면 좌회전이나 우회전이나 유턴의 순간도 필요하겠지만, 어디 직진의 통쾌함에 견줄 만 할까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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