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향기가 머무는 곳
그 향기가 머무는 곳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01.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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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겨울바람이 달다. 분명 매서운 찬바람임에도 그 바람이 달다. 나뭇가지에 일렁이는 바람을 가르고 고택을 바라보며 덩그마니 서서 담벼락에 쭉 뻗은 나목에 설렘을 걸어놓았다. 솟을대문엔 항상 계속되는 봄을 말하는 상춘당(常春堂)이란 현판이 또 한 번 설레게 한다. 양쪽 문간채를 두고 한껏 높인 솟을대문은 이 댁의 권세와 재력을 가늠케 했다. 금방이라도 대청마루에 갓을 쓴 선비가 있을 것 같은 청주 인근의 전통가옥, 양끝에 술이 달린 세조대를 맨 도포 자락 휘날리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주인장의 헛기침 소리가 울려 퍼질 것 같아 달 뜬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상춘당 대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 퇴색되었지만, 운치가 있고 누마루가 있는 아늑한 안채가 보인다. 사대부 양반가는 아니었지만 200년 선조의 삶과 향기를 간직한 채 불편함을 감수하시면서 옛것을 보존하며 후손이신 노부부가 거주하고 계신다. 생활하기 편리하고 오색찬란하고 화려한 현대식 건축에서 노후를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간절할 텐데, 어르신들의 온기가 전해지는 계자각난간의 누마루와 툇마루는 물론 쪽마루까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겨울의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구들과 여름철 시원한 마루, 한옥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은 비밀스런 깊은 바다 속 같은 여자마음처럼 한없이 신비롭고 은은하게 전해진다. 여인들의 향기와 고운 자태의 안방마님 한복 자락이 안방에서 부엌으로 장독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절로 연상된다. 선인들의 뜻을 품은 고택, 기와를 얹은 담장 아래 크고 작은 깨진 항아리에 심어진 분재들이 겨울 햇살을 맞이하고, 잔디가 촘촘하게 심어진 너른 마당 그리고 다양한 항아리가 즐비하게 정리된 장독대는 마음마저 과거로 돌려놓고 있었다. 한 컷 한 컷 렌즈에 담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던 안주인이 안내한 별채의 대들보를 보고 난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

예로부터 너른 대청마루와 대들보는 그 집의 규모를 알 수 있을뿐더러 집안의 가풍과 권세를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옛날 한옥의 중심부인 대들보 목재를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일수록 대들보감으로 안성맞춤인데 당연 깊은 산 속에 있을 터. 제아무리 대들보감으로 출중한 나무를 찾아도 당시 운반이 문제였다. 허나, 부귀와 권세가 있는 집안은 수많은 경비와 사람들을 동원해서라도 원하는 목재를 공수했고 도편수는 우람하고 늠름한 대들보를 만들어 얹었다. 한옥의 기준점은 대들보인지라 대목수는 기준점이 공중에 있다고 한다. 한옥의 기둥과 도리 그리고 보가 만나는 한 점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상춘당 뒤꼍에 있는 자그마한 장독, 그 중 커다란 항아리 위에 민초들이 사용했던 복자가 그려진 사기 주발이 주둥이가 깨진 채 엎어져 있다. 부엌의 쪽문으로 이어진 장독길이 반들반들한 걸 보니, 여전히 종갓집 종부로서 당신의 삶보다 종부로서의 삶을 살아온 안주인이다. 우주를 날아다니는 세월임에도 여전히 애환을 간직한 채 예전의 삶의 방식이 몸에 배어 몸이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며 살고 계신 안주인은 그저 그것이 행복이란다. 종부로서 어깨에 짊어지고 온 세월을 느낄 수 있지만 내 어찌 실감을 할 수 있겠는가.

살다 보면 밋밋한 일상이 지루하고 따분해지기 마련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단아하면서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고택에서 나만을 위한 시간, 시간이 멈춘 그 향기 속에 인연의 끈을 처마 밑에 가만가만 묶어놓았다. 향기가 머문 그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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