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조헌의 혼이 깃든 후율당 앞에서
의병장 조헌의 혼이 깃든 후율당 앞에서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1.1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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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옥천의 자랑이자, 충청인이 긍지로 생각할 만한 인물을 조선 시대에서 고른다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몰아내고 청주성을 되찾은 의병장 조헌(趙憲)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조헌(1544~1592)은 충청도 사람이 아니다. 그는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지만 충청북도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조헌은 명종 22년(1567)에 과거에 급제한 뒤 호조와 예조를 거쳐 보은 현감으로 충북과 인연을 맺었다. 그 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옥천에 `후율당'(後栗堂)이라는 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후율당이라는 서당 이름은 조헌이 율곡 이이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지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조헌은 평소에 스승인 율곡 이이의 생각과 같이 일본에 대비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신을 보내어 조선에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는 요구를 하며 조선의 사정을 정탐하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조헌은 옥천에서 한양으로 수백 리 길을 한 달음에 달려가 대궐 문밖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과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역시 조정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선조 25년, 1592) 그의 예상대로 일본이 침략해왔다. 이에 조헌은 옥천 후율당에서 의병을 일으켜 1500명이 넘는 군사를 모았다. 그리고 영규 대사가 이끄는 승병, 의병장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되찾았다.

조헌과 의병들은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충남 금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전공을 시기한 관군의 방해로 함께 간 의병 대부분이 해산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헌은 끝까지 떠나지 않은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금산에서 싸우다 결국 전사했다. 이때 조헌의 나이 49세였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가진 조헌은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조헌은 이이와 교류한 학자 중 가장 뛰어난 학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정신을 기리는 곳이 충북에도 여러 군데 유적으로 남아 있다. 청주 중앙공원에 조헌 전장기적비가 있고, 보은에는 상현 서원이 있다. 옥천에는 그의 묘소와 신도비, 후율당과 표충사가 있다.

조헌이 제자들을 가르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곳이기도 한 후율당은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대덕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뒤에 낡아 없어진 것을 조헌의 제자와 후손들이 옥천군 백양동에 다시 지었고, 그 뒤 고종 1년(1864)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다. 지금 건물은 1977에 다시 보수한 것으로 충청북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율당 앞에는 충효각이 서 있다. 그 안에는 조헌의 충성을 기리는 충신문과 그의 아들 조완기의 효를 전하는 효자문이 함께 들어 있다. 충신 집안에 효자가 난다고 했던가. 후율당 앞에 서서 이웃과 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부해서 남 주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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