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램프
삶의 램프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9.01.0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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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박명애 수필가

 

오랜만에 딸애와 겨울 산을 오른다. 숲은 바싹 메말라 발밑에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도 건조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앞서 가는 사람들 발끝에서 먼지가 푸슬푸슬 핀다. 겨울 가뭄이 길어지나 보다. 눈길을 걷는 즐거움이 없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공기는 청량하다.

이따금 등산로 곁에는 청설모들이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를 건너뛰며 숲에 활기를 준다. 단단한 숲의 열매를 움켜쥐고 씨름을 하다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는 청설모를 사진에 담으며 딸애는 옛집 뒤뜰 감나무를 제집인 양 오르내리던 청설모 얘기를 했다. 청설모가 머물다간 소나무 거친 둥치 깊은 골에는 푸른 이끼들과 버섯이 피어 있었다. 늘 익숙한 풍경이지만 간벌이 되어 삶을 거세당한 뒤에도 다른 생명을 품어 키우는 나무의 삶은 마주할 때마다 뭉클하다. 넘어진 나무들 위로 덮인 솔잎을 보니 겨울 방학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관솔을 따러 마을 숲을 누비던 기억이 떠오른다. 소나무 가지나 옹이에 붙어 있는 불그레한 관솔을 떼어다 빈 깡통에 넣고 불을 붙이면 송진이 지글지글 끓던 소리가 기분 좋았다. 아이들의 함성과 빙빙 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불꽃들은 나를 알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어 어른들이 찾는 소리마저도 지워버렸다. 이 숲도 누군가에겐 그리 아름다운 시절의 유산이겠지.

걷기에도 위태로운데 산악자전거가 지나간다. 울퉁불퉁 혈관처럼 불거진 나무뿌리 위를 비틀거리지도 않고 매끄럽게 내려간다. 옆으로 지켜서 있던 딸애가 웃는다. 그 웃음이 무언지 말을 안 해도 나는 안다는 듯 따라 웃었다. 마을에 제 또래 여자 친구가 없던 딸애는 늘 오빠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누볐다. 키가 작아 자전거타기엔 발이 잘 닿지 않는데도 씩씩하게 끼어 다니더니 어느 날인가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들어왔다. 언덕에서 좁은 논두렁길을 내려 달리다 갓 모내기해놓은 논으로 넘어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서툰 손으로 딸아이가 망쳐놓은 논에 모를 다시 심어줘야 했다. 웃음이 난건 내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큰집 마을 근처 저수지는 늘 썰매 타는 아이들로 붐볐다. 날이 하나인 외발 썰매를 타고 선망의 눈길을 즐기며 얼음 숨구멍 위를 능숙하게 지나면 물이 살짝 올라왔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놀이였다. 그런데 그 자존심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어떻게든 날 떼어놓으려는 사촌오빠들과 다투고 혼자 돌아가던 길 논을 가로지르려다 늪에 빠진 것이다. 오빠들이 달려와 나를 끌어냈지만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다. 대성통곡하며 대문을 들어서는 내게 큰어머니는 계집애가 저리 얌전치 못하고 왈패 같아 어디다 쓰느냐고 뭐가 되려는지 모르겠다고 목청 높여 꾸지람하셨다. 거칠게 씻김을 당하고 안방으로 밀어 넣어진 나는 기가 죽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자식들 거두기도 고단한데 방학이라고 말괄량이 조카딸까지 와서 사고를 치니 큰어머니도 고단하셨을 게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내게 큰아버지는 벽장에서 흰 가래떡을 꺼내 화로 속 잉걸불에 구워주셨다. 화로를 뒤적일 때 괄게 일던 불빛과 떡에 묻은 재를 떨어내던 소리로 기억되는 그 풍경은 램프처럼 삶을 따뜻하게 비춰준다. 누구에게나 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그런 시절의 유산이 있지 싶다. 누구에겐가 따뜻한 기억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자며 손잡고 걷는 이 길도 훗날 우리에게 그런 삶의 램프가 될 것이다. 나무의 옹이진 뿌리에서 햇살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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