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가르쳐 주셨던 분
원칙을 가르쳐 주셨던 분
  •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 승인 2019.01.0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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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며칠 전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다녀왔다. 어느 상가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분위기가 침통했다. 지병이나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으니 자손들 입장에서는 더없이 아쉽고 황당했을 것이다. 별세하시기 3일 전 며느리의 승진 소식에 집안에 경사가 났다고 크게 기뻐하시며 축시까지 써 주셨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이 90번째 생신이시라 가족들과 식사하며 즐겁게 담소하셨단다. 주변에서 병들어 고통스러워하다 돌아가시는 분들을 자주 보아왔던 터라, 참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는 생각과 함께, 자손들은 이별의 준비가 안 되었을 텐데 많이 아쉬울 거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30여 년 전 내가 청원군청 사회복지과에 근무할 때, 고인께서는 청원군 부군수(신인호)이셨다. 아들의 친구라서인지 직장에서 만나면 늘 인자하게 웃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한 계급만 높아도 하늘같이 우러러 보였던 시절이었으니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내게는 든든한 힘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어렵고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난감한 일이 생겼다. 생활보호대상자 수시 지정 서류였는데 결재를 해 주시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생활보호대상자를 지정하려면 생활보호심의위원회를 개최하여 의결해야 하는데, 그 절차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1년에 한 번 전체 대상자를 지정할 때는 실제 회의를 열어 심의를 받지만, 수시로 할 때는 번거로워 생략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끝내 결재를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수시로 회의를 하는 게 번거로울 수 있지만, 그래도 회의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공무원 생활을 막 시작하는 자네에게 편법을 인정할 수는 없네”라고 말씀하셨다. 서류를 들고 나와 결재를 받지 못한 사연을 담당계장님께 말씀드리자 크게 서운해 하신다. 늘 그렇게 해 왔는데 왜 유난스럽고 까다롭게 하는지 모르겠단다. 결국은 다음날 부군수 주재 아래 생활보호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나서야 결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행정을 하면서 관행이나 편법을 쓰지 않고 법규나 원칙에 충실했다. 그래서 33년간 공무원 생활을 큰 실수 없이 할 수 있었다.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참 번거로울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답답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정행위에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공정성과 일관성이 지켜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관행과 상식 이전에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고인께서는 아들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가면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곤 했었다. 그러면 친구들은 자유롭게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실 수 있었다. 그렇게 늘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시더니, 가족들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이렇게 홀연 세상을 등지셨는지요. 나이 드셔서 추레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외출을 삼가신 다기에 몇 달 전 식사나 한번 모시겠다고 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원칙을 지키라는 가르침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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