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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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1.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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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두 볼이 시퍼렇게 언 12월이 뿌연 새벽을 달려와 숨을 몰아쉬고 있다. 두 얼굴의 모습이다. 얼굴엔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다시 새해를 맞이하는 기대로 엇갈린다. 무술년은 자꾸 지난날을 반성하라고 한다. 이룬 것이 무엇인가 되돌아보라고 다그친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표시 나는 일이 없다. 질문에 입을 꾹 다문다.

기해년도 새해 계획표를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지난해에 못했던 목표를 다시 세우라는 다짐의 압박을 받는다. 얼마 남지 않은 12월의 숨통을 조여 온다. 그래도 뾰족한 설계도가 나오질 않는다. 내세울 게 없으니 할 말을 잃어 다시 침묵한다.

쉴 새 없이 달려온 열두 달이다. 일 년이 저물어 가는데 지는 해를 화려한 노을로 배웅하지 못하고 있다. 1월에서 개울을 건너뛴 듯 훌쩍 끝자락에 당도한 느낌이다. 해마다 마주하는 12월인데도 볼 때마다 낯설다. 또 온 속력으로 내달려오는 1월은 조마증이 난다. 이 나이에도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일이 어색하기만 하다. 어디인지 헷갈리는 사거리에서 우두망찰하고 서 있는 동지(冬至)의 아침이다.

나의 교차로에는 황색 점멸등만 껌뻑이고 있다. 스스로 알아서 가라는 신호다. 때때로 좁은 길에 들어서서 나를 향해 오는 상대편을 발견할 때면 난감하다.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길에서 서로 지나치다 보면 부딪힌 상처로 수없이 긁힌 자국이 남는다. 때로는 깊이 패진 상처가 아물기까지 오랜 시간을 앓기도 한다.

내 눈에 비친 다른 사람들의 삶은 좋아 보인다. 자신을 위하여 끊임없이 공부도 하고 SNS에 올려 있는 여행사진은 더없이 행복하다. 여러 가지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 부럽다. 한 가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는 그들을 보면서 한없이 작아지곤 한다. 이맘때면 깊은 자괴감으로 심연에 빠진다. 이런 나를 오랫동안 말없이 안아주고 섧은 흐느낌이 잦아지기를 나는 기다려준다. 방안이 온통 고요해져서야 어루만지며 책에서 본 어느 작가의 말을 들춰내는 것이다.

“누구도 당신만큼 당신 인생을 고민하지 않았고 누구도 당신만큼 당신을 잘 알지 못해요. 그러니 “당신은 늘 옳다” 이 한마디 믿으셔도 좋아요.”

그래,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이도 없다. 아무도 나만큼 내 인생을 고민하지 않았고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를 위하여 고스란히 아파하고 괴로워한 사람도 나이지 않은가. 걱정거리로 몇 날 밤을 지새워도 대신 밤을 새워줄 이는 누구도 없다.

쉰 네 살의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결실이 없다하여 잘못 산 삶은 아니다.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했으면 된다. 내 인생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속상할 일도 아니다. 내 삶의 주연은 나이기 때문이다. 남은 조연이며 조연에 의해 펼쳐지는 연극은 없으니까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나로 인정하기로 한다. 남과 비교하여 내가 얼마만큼 왔는가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알맞은 속도로 잘 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일이니까.

타인과의 말수를 줄이고 나와의 대화를 늘리는 달. 옆 사람을 다독이기보다 나를 토닥여주는 12월을 오롯이 나와 보내고 싶다. 가만히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물이 차갑고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수압의 바다. 너무 깊어 빛이 도달되지 않는 곳. 그 심해로부터의 독백을 듣는다.

`많이 힘들었지. 일 년 동안 사느라, 살아내느라, 이만큼 견디고 버텨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정말 수고했고 늘 너의 하루하루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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