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을 오르며
태백산을 오르며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19.01.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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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선생님의 발걸음이 확연히 무뎌지셨다. 몇 발짝 떼지 못하고 멈추시는 모습에 세월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속절없게 느껴졌다. 최근 몇 년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운동하실 시간이 없어 벌어진 일이라 위안을 했지만, 늙는다는 것은 그렇게 우리 옆에 와 있었다.

이번 태백산은 스물한 번째 등반이었다. 연구년이었던 작년 한 해를 빼고 매년 그 산에 올랐다. 스무 번이나 태백산 등반을 지켜본 남편조차 이제 산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핀잔 아닌 핀잔을 준 지가 꽤 되었지만 태백만을 찾았다.

정년한 지가 9년이 된 선생님의 뒷모습을 따라 걷는 길은 선생님이 현직에 계실 때보다 훨씬 좋다. 그때는 선생님이 두려웠다. 큰 틀에서만 무언가를 정해두실 뿐 세밀한 것들은 자유롭게 하도록 해주셨기에, 그 책임감이 언제나 무거웠다. 하지만 그 덕에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행하는 법을 배웠다. 지금, 선생님은 나에게 논문 지도도 강의도 하지 않지만 선생님을 따라 걷는 이 길에서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다.

못다 이룬 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환생한 티베트 불교 승려를 린포체(Rinpoche)라고 한다. 린포체는 일반 승려보다 더 깊은 불심과 노력, 자신이 못다 이룬 그 업을 완성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고, 특히 전생에 자신이 속했던 사찰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지난 주말 린포체의 이야기를 다큐로 엮은 `다시 태어나도 우리'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며 태어난 린포체 파르마 앙뚜, 그를 보살피며 섬기는 고승 우르갼 릭젠, 인도에 사는 그 둘이 앙뚜의 티베트의 전생 사찰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재미난 사건은 없지만 숨 막힐 듯 밀려오는 벅찬 감동이 있었다.

린포체가 된다는 것의 선행 조건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이었지만, 중생을 향한 연민을 지닌 훌륭한 린포체가 되는 것의 8할은 그를 기르고 가르치는 스승님이 아닌가 싶었다. 어려운 여정 끝에 티베트와 인도의 국경 한 사원에 앙뚜의 린포체 교육을 맡기고 돌아서는 우르갼 스님, 앙뚜와 우르갼 스님은 사원의 풀밭에서 눈싸움 한 판을 벌인다. 풀밭의 눈싸움. 눈이 없는데, 둘은 아주 신나게 눈싸움을 한다.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 기준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어린 제자이며, 동시에 섬겨야 할 대상인 린포체를 타지에 두고 떠나는 스승 우르갼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훌륭한 린포체가 되어야 한다는 스승의 요청과, 꼭 그리되어서 다시 스승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하는 앙뚜의 대화는 작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좋은 린포체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신의 삶을 걸고 자신이 가르치는 그가 훌륭한 사람임을 믿어주는 것, 그 믿음을 느끼고 미약한 자신을 더 훌륭한 존재로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린포체가 되는데 가장 강렬한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하기까지, 너무나 미약한 나를, 훌륭한 존재라고, 의심 없이 믿어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믿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처럼 헌신하고 있는가? 갑자기 세상에 빚진 자가 된 듯 느껴졌다. 태백산 걸음마다 선생된 자가 느껴야 할 책임감을 느끼라고 선생님께서는 내 앞에서 그리 열심히 걸으셨건만, 눈 어두운 제자는 스무 해를 걷고서야, 선생님의 발걸음이 한참을 느려지고 난 후에야 이제 조금 알아간다.

새해 모든 선생님께도 빚진 자의 마음으로 감사 인사를 올리고 싶다. 또 올 한해 자신의 교실에서 그들이 훌륭한 사람인 것을 굳게 믿으며 자신을 불사를 이 땅의 귀한 선생님들, 참 고맙습니다.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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