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송(山訟)
산송(山訟)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 승인 2018.12.30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 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조선 후기 고문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산송(山訟)은 일상이었다. 산송은 산의 주인을 다투는 송사로, 이때 소유권을 결정 짓는 주요한 증거가 산소(山所)였다.

그런데 선대 묘소가 실전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었다. 대부분 문중에서 `고려사'등에 등장한 중시조로 `설정한'인물들의 앞 세대는 물론이고, 특히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세대는 더욱 그러했다. 왕조 교체기의 혼란함이 더하고, 많은 이들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숨어 살았다고 믿던 때였다.

물론 본향을 지키며 살던 몇몇 성씨를 제외하면 대부분 세계를 온전히 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왜란과 호란이 거듭되면서 선대의 세계를 기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조선 전기는 족보조차 드물었다. 그나마 그 족보조차 여덟 고조, 팔고조(八高祖)와 배우자, 그리고 이후 세대를 통해 나를 확인하는 역삼각형 구조였다. 자신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성씨가 다를 수 있는 일곱 고조를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족보에는 혼맥으로 연결된 수많은 타성 조상들이 나열되었고, 이는 만성보(萬姓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족보의 상대 세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지난한 창작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사실 시조조차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상, 저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기억할 수 있는 최대치의 선조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란과 호란 이후 갑자기 예론(禮論)이 강화되고, 신분제 해체와 함께 벌열(閥閱)을 드러내려는 노력이 잇달았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족보 편찬은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선조의 묘소 찾기에 돌입하였다. 초기 족보가 단지 수록 인물의 관직이나 배우자 정도만 기록하던 것과 달리, 후대로 갈수록 생몰연대를 비롯, 자호(字號) 등 기록이 풍부해졌다. 더불어 묘소의 위치까지 꼼꼼이 기록하였다. 그것은 족보를 통해 선조의 묘소를 확인받으려는 의도였으며, 갑자기 늘어난 묘표와 같은 빗돌도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게다가 묘소 앞에 세운 비문을 당대 명망 있는 인물로부터 받는다면 명예를 떠나 커다란 공신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 들어 자신의 신분과 부(富)를 드러내던 음택(陰宅) 풍수의 유행도 산송을 부채질했다. 치열한 땅따먹기 전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산송의 유행은 산천의 소유가 불분명한 데서 출발한다. 권세가와 궁방(宮房)이 주인 없는 하천 개간을 통해 땅을 넓혀갔던 때도 이즈음이다. 일제가 역둔토 수탈에 나서고, 강제 병합 후 토지조사사업을 거치며 하천 부지와 임야에 대한 소유권을 분명히 할 때까지 이러한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우암 가문도 산송을 비껴갈 수 없었다. 1668년(현종 9) 4세 송명의(宋明誼)의 묘 뒤에 몰래 묻은 일로 송사를 벌여 김씨 묘를 파내 옮긴 일이 있었다. 비록 산송이라 하였지만 당시 우암의 위상을 고려하면 김씨가의 패소는 쉽게 예견할 수 있다.

한편 대동보 편찬 이전의 혼란을 말해주는 사례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우암 선대 중 4세 송사민(宋斯敏)이 적장자로 아들 없이 죽은 한참 뒤 동생의 현손인 송순년(宋順年)을 후사로 삼은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여러 글을 통해 그 내막을 밝히고 있다. 한편 우암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알려진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실제 촌수로 보면 삼촌뻘임에도 동생처럼 대했다.

통일의 기운, 비무장지대가 들썩인다. 대통령이 GP를 다녀갈 정도면 평화의 기운을 느낄 만도 한데, 오히려 벌써 개발 호재가 앞선다. 어김없이 산송이 등장할 것이다. 한국전쟁 직전 토지대장이 있다면 모를까 전쟁으로 인멸되었을 것이 뻔한 이곳에 누군가는 무주공산(無主空山)에 깃발 꽂는 기회로 여길지 모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