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밤이 선생이다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8.12.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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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대헌:밤이 선생인 까닭은?

현산:낮이 논리와 이성, 합리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직관과 성찰과 명상의 세계, 의견을 종합하거나 이미 있던 의견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좋은 시간이에요. 저는 아프기 전엔 새벽 5시에 잤습니다.

대헌:어떻게 해야,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현산:지금 이 세상에서 `미래의 초인(超人)'으로 사는 겁니다.

대헌: 거대담론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현산:그보다는 찌질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해요.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하니까요.

대헌:언젠가 한쪽 눈을 가리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더군요.

현산:이 비극적인 상태, 이 절망적인 상태를 변화시킬 순 없어도 적어도 이것이 있다는 것, 이것을 향해서 눈을 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요.

대헌:세상이 갑자기 낯설어진 사람들을 덜 외롭게 해 주시는군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지쳐 있는 것이니, 일을 좀 적게 하고 지치지 않게 해야 된다고 위로해 준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과 나누었던 가상의 대화였습니다. 그의 인터뷰 자료를 탐독하다가 구성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성에 차질 않더군요.

2015년 5월에 읽었던 다른 대화록을 다시 불러내 찬찬히 곱씹게 되고 말았습니다.

“사물의 현상 밑으로 내려가서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면 모든 게 다 지겨워집니다.”

“타자로서 객관화시켜 보면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상투어를 안 쓰면 글을 잘 쓰게 됩니다…글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말을 성찰한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 아들이 말하는 아버지로서의 황현산도 건너뛸 수 없는 대목이었지요.

“말이 잘 통하는 좋은 선배 같아요.”

“충고보다는 직접 당신의 삶의 태도를 통해 가르치는 분이십니다.”

68세였던 2013년에서야 처음으로 삶의 단상(斷想) 같은 글들을 모아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펴냈던 황현산 선생이 삼십여 년에 걸쳐 드잡이해 온 포기할 수 없던 전망은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이었더군요.

그의 책에서 `찌푸린 얼굴들'이란 꼭지를 읽으면서는 도미에의 `삼등 열차'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 연상되어 가슴이 저리기도 했습니다.

“육법전서를 외우기는 쉬워도 밤의 말을 듣기는 어렵다”고, “천 년 전부터 우리에게 밤이 선생이었다”는 말을 두고두고 고개를 돌려보게 만드는 애절한 꽃신처럼 남겨 놓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황현산 선생을 추억하면서, 우리 사회의 민낯에 대해 적잖이 염려하게 됩니다.

구체적이면서도 유연하다는 진면목을 드러냈던 그의 말들은 오늘도 저 멀리까지 경종을 울리고 있군요. “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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