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에 무늬를 새기는 사람
터에 무늬를 새기는 사람
  • 이수경 충청대 패션디자인과 교수·이미지소통전략가
  • 승인 2018.12.2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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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이수경 충청대 패션디자인과 교수·이미지소통전략가
이수경 충청대 패션디자인과 교수·이미지소통전략가

 

집은 사람을 닮는다고 한다. 집 대문, 담장, 그 사이를 지나 들어서는 순간에 느껴지는 집의 기운은 주인을 닮아 깊고 얕은 무늬를 보여주고 단내, 쉰내도 느끼게 만들고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달달한 이야기도 입에 쓴 이야기도 도란도란 나눌 수 있게 만든다.

부모님 세대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집 장만을 해서 자식에게만큼은 집이라도 물려줘야겠다는 의지로 힘들게 살아오셨던 이야기도 종종 들었듯 그렇게 우리가 나고 자란 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의 정서는 추억을 담아내기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음박질이라도 치는 양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변형시키고자,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부수고, 높고 단단한 건물들을 세우고, 길을 닦고 넓혀,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마저도 뒤돌아보지 말고 살라는 듯 후다닥거리며 차갑기만 하다.

70년대 청주시 문화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의 기억 속에 따뜻하게 머물던 아버지가 손수 지으셨다던 우리 집이 있던 그 동네는 높다란 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서 흔적조차 알 수 없는 낯선 곳이 되었고, 문화재생도시를 지향하는 청주시지만 추억이 아로새겨진 터를 보존 재생하기보다는 언제 그 자리가 있었냐는 듯 공들여 손수 지었던 벽체는 폐기물이 되어 자취를 감추고 마치 사연 있는 어느 누구도 안 살았다는 듯 높고 차가운 신축건물이 들어서고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추억이 있던 사람들의 고향마을은 이렇게 메마르고 계산적이게 돌아가는, 때론 터무니없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어느새 나고 자란 삶의 터는 무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삶의 터에 일부러 그리지 않아도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문짝 하나 방바닥 하나에도 무늬가 새겨지는 것처럼 고유지명을 가졌던 터가 문화역사의 무늬를 잃어버리는 것이 슬프기라도 했던 것인지, 무엇하나 영원히 소유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라도 했던 것인지 사람들은 컨트롤할 수 있는 자신의 신체에 기원을 담아 무늬를 새겨넣기 시작했고 이는 인류문화의 기원 중에 신체보호설과, 신체장식설로 살펴볼 수 있다.

분류해서 설명할 수 없는 패션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종족 중 의복이 없는 종족은 있어도 신체장식이 없는 종족은 없었고, 인류는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무언가를 위해 신체를 장식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대나 문화권에 따라 신체장식방법이나 미의 기준에는 차이가 있으나 신체를 장식하고자 하는 욕구는 동일한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욕구를 담은 신체장식이 기후, 자원, 기술 등에 따라 채색이나 문신과 같이 몸에 직접 장식하는 방법, 장신구로 장식하는 방법, 의복으로 장식하는 방법 등으로 다양하게 이뤄져 왔던 것처럼 청주도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서 신체장식방법과 미의 기준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개인의 욕구에 따라 변화되는 모습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터무니없는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가 황당해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지금 있는 이 자리를 아끼고 보존하여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아니 되살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누구나 자기가 있는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내 고장의 문화를 보존하고 재생하고 융합시켜 터에 무늬를 아로새기는 일을 내가 먼저 해보면 어떨까? 청주시에 더는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터에 무늬를 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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