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억하고 있나요?
지금도 기억하고 있나요?
  • 권진원 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 승인 2018.12.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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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권진원 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권진원 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12월 한 해의 마지막 달 자연스레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연말이라는 특별한 시간 안에 한해의 반성과 새해의 희망을 그려볼 것입니다.

저는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뽑으라면 `미투(me too)운동'입니다. 용기 있는 한 여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이 운동은 일파만파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연이은 사회 곳곳의 성폭력 사건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수치심 때문에 부정적인 시선으로 감히 소리 내지 못하고 묵혀두고 참아야만 했던 우리들의 아픔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저명한 작가와 배우, 연출가를 비롯하여 종교인들과 선생님들까지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폭로가 이어지며 우리 사회의 민 낯을 보았습니다.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경악하고 파렴치한 이들의 만행에 치를 떨며 분노했습니다.

그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던 상사의 농 짙은 성적 말들에서도 커피를 주문하며 몸매를 평가하던 시선과 말에서도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며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이 당연히 술 한잔을 따라야만 했던 관행에서 문제가 많았음에도 우리는 그냥 넘어가야만 했습니다. 소속된 극단의 연출가에게 또는 문단의 큰 시인에게 찍히지 않으려 그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였고 배우의 길에서 출세를 보장한다는 말에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조여오는 악마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하였습니다. 언제나 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추악한 성적 요구들을 여성 혼자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여러 방면과 루트로 호소와 진정을 냈지만 그때마다 당하는 것은 여성이었습니다. 직장에서는 부서를 이동하거나 혹은 자신의 위치에서 배제되거나 많은 경우 자진해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삶과 인생을 포기해야만 그나마 작은 소리 정도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의 미투운동은 이들에게 큰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숨지 않고 떠나지 않고도 당당하게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언론과 사회의 힘을 빌려 이 파렴치한들을 몰아내고 더 이상 죄인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몇몇 폭로된 사람들의 법정 다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던 이들도 이제 기억에서 잊혀지고 서서히 미투운동이 잠잠해지자 `억울하다. 누명이다.'라고 말하며 공방 중에 있습니다.

지난 3월 정부가 설치한 `공공부문 성희롱 성폭력 특별신고센터'에 접수된 사례 중 신고 후 2차 피해를 입은 경우가 95%에 이른다는 보고를 보고 잠시 지나가는 폭우였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힘있게 시작한 운동이 기운이 빠지고 다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버렸는지….

여전히 우리 사회는 남성우월주의에 빠져 있고 전반의 갑질은 여전하며 약자의 편에서 함께 소리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방송에 이슈가 되면 그때만 잠깐 빛을 반짝이며 간단한 화면의 터치와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관심을 표현합니다. 재조명되며 당시의 수사가 잘못되었음을 밝힌 故장자연씨 사건도 사람들은 겨우 제목 정도만 기억할 뿐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올 초부터 그렇게 한 달 넘게 휘몰아치던 폭풍은 잠잠해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비단 여성의 성폭력을 넘어 우리 사회 소수와 약자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킬 힘을 발휘할 건강한 시민사회와 언론이 절실합니다. 이번처럼 쉽게 잊혀지고 아픔이 아물거나 치유되지 못하고 더 큰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내년에는 조금 더 성숙한 사회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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