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축소판 옥천 향교를 찾아서
성균관의 축소판 옥천 향교를 찾아서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8.12.1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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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옥천향교는 정지용 생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마을이름도 `교동리'이다. 옥천향교는 성균관의 축소판이라 부를 정도로 조선 시대 교육기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지방에 세운 중등 교육기관인 향교는 어디를 가나 대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는 옥천향교는 특히 향교 건축의 표준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학교에도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실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향교에도 시설을 관리해야 하고, 특히 향교는 제사를 지냈으므로 제사도 준비해야 했다. 따라서 이 같은 업무를 담당할 관리실이 필요했는데, 이것을 `교직사'라 한다. 다른 말로는 `고직사', 또는 `고지기집'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우리 전통 건축에서 향교처럼 신성한 공간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붉은색 칠을 한 문을 말하는데, 붉은색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홍살문부터는 깨끗하고 신령스런 공간임을 상징한다. 또, 홍살문의 앞에는 대개 하마비를 세웠다. 하마비에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태조 7년(1398)에 지은 옥천향교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그 뒤에 여러 차례 다시 지은 것이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 하마비와 홍살문이 보인다. 향교의 하마비는 사라져서 최근에 세운 것이 많은데,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란 글씨가 잘 남아있는 이곳의 하마비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홍살문을 지나면 2층의 누각 형식으로 된 명륜당이 있다. 1층의 가운데 칸이 출입문이고, 2층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강당이다. 특히 2층의 좌우 한 칸씩은 그 아래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봐서 온돌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 뒤에 서쪽으로 `홍도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서재가 남아 있다. 동재는 없어졌으며, 그 오른쪽으로 향교 관리실인 교직사가 남아 있다.

옥천향교는 경사진 곳에 지었으므로 대성전이 명륜당의 뒤에 있는 형식이다. 명륜당 쪽에서 대성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 삼문을 통과해야 한다. 대개 향교의 안쪽 삼문은 가운데가 솟아오른 솟을삼문 형식인데 비해 이곳 삼문은 같은 크기의 삼문이 간격을 두고 배치된 조금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제사 공간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잘 남아 있다. 지금은 향교의 교육 기능이 사라졌지만, 제사 기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매년 봄, 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향교는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설치되었으므로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향교의 운영을 위해서 국가가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계속했다. 이것은 조선 건국 이후 새로운 국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숭유억불적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 정책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교육 혁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미래 사회를 대비하고, 다음 세대의 주인공을 키우는 교육 문제에서 만큼은 깊은 성찰과 소통, 협력의 과정이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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