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만에 다시 찾은 청주 영운동 옛 피난민수용소(1)
71년 만에 다시 찾은 청주 영운동 옛 피난민수용소(1)
  • 김운기 사진가
  • 승인 2018.12.17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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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운기 사진가
김운기 사진가

 

청주 영운동 옛 피난민수용소 건물은 여전한데 강산이 일곱번 변했다. 가족들이 월남해 일주일간 머물렀던 피난민수용소다. 당시 내 나이 11살이었으니 71년 세월이 흘렀고, 세월만큼 주변도 많이 변했다.

내가 청주에 처음 온 것은 1947년 2월이었다. 우암산에 눈이 하얗게 쌓였던 도시는 깨끗하고 조용했다. 서울처럼 자동차도 없고 높은 건물도 없지만 내가 본 강원도 철원과 춘천보다 더 큰 도시였다. 첫 인상에 맑고 차분해 보였다.

우리 가족과 서울에서 만난 담이네 가족이 월남해 함께 안내된 곳은 청주시 영운동 청남학교 뒤편에 있는 말자형으로 길게 지은 “피난민 임시수용소”였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피난민이 수용돼 있어 우리와 담이네가 방 한 칸을 배정받고 함께 지냈다. 바깥이 추워 이틀 동안 방에만 있던 나는 밖으로 나왔다. 또래의 친구들이 수용소 주변에서 제기차기하며 놀고 있었다. 그애들과 함께 놀다가 “시내 구경 해보자”는 내 제안에 친구 2명이 길을 나섰다. 처음 찾아간 곳은 중앙공원이었다. 그곳엔 큰 은행나무와 독립기념으로 세운 비석이 있었고, 거북을 앉힌 분수대는 겨울이라 물이 나오지 않았다.

황해도에서 온 친구가 “저거 당산나무야 우리 고향에서는 큰 나무에 제물을 차려 1년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개성 이북 땅에서 온 친구는 “저나무를 베어 땔나무로 사용하면 여러 집이 한겨울을 날 텐데 청주사람들은 땔나무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동네 사람들이 보호하는 나무는 아무나 해칠 수 없어. 저 밑을 봐 벼락을 맞아 검게 탄 모습 좀 보라구”하며 아는 체를 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서로 이름도 모르고 그저 황해도 친구, 개성 친구, 강원도 친구로 불렸지만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금세 친해졌다.

우리는 중앙공원을 나와 본정통을 지나 지금의 방고개 내덕동 삼거리까지 걸어갔다. 시내를 내려다보니 길가에 초가집도 많이 보였다. 청주에서 가장 큰 건물인 도청에도 갔는데 울타리에 심어놓은 측백나무가 가지런해서 보기 좋았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모습과 크기가 좀 다를 뿐, 측백나무는 여전하다.

수용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는데 옆방에서 “이 새끼 빨갱이 아니야”라며 뺨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잘 생긴 청년이 두 사람에게 매를 맞으며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잡혀갔다. 이틀 뒤 황해도 친구 가족과 다른 몇 가족이 트럭에 실려 음성으로 간다고 했다.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은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야 했다.

우리 가족이 청주로 피난온 것은 강원도 금화군 창도면 형석광산에서 광석을 캐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중병을 앓게 되면서 광부 일을 접고 1945년 작은집이 있는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배급을 타 먹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배급이 끊기면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아버님은 이북서 목화솜을 가져다 38선을 넘어 춘천에서 팔고, 그것을 소금으로 바꿔 이북에 팔며 겨우 먹고살았다. 그렇지만 이북에서 화폐 개혁을 하면서 남한 돈을 쓸 수가 없게 됐다.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춘천 샘밭 “피난민수용소”에 일주일 지내다가 충북 충주로 가라는 공문서를 들고 서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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