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서울바라기
촌놈들의 서울바라기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 승인 2018.12.16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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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두 가지 내부 강령을 마련했다. 왕비를 자신들의 가문에서 뽑자는 것이고, 산림(山林)을 우대한다는 것이다. 권력이 베갯잇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각처의 인물을 시험 없이 뽑아 썼다. 우암이 단지 소과인 생원시 합격에 불과하지만, 좌의정에 오를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천거 덕분이다.

서인-노론의 집권이 계속되며 처사(處士)를 자처하던 산림, 곧 재야에 숨은 학자와 그의 제자들이 관료로 진출하였다. 바로 기호학파와 노론정파가 우위를 드러냈다. 이때 우암의 인기는 대단했다. 노론의 영수요, 주자대의의 일가를 이루었으니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난번 살펴보았던 관아 건물의 기문처럼 개인의 `기억'에도 올 곧이 남아있다. 몇몇 남인 집안을 제외하고 우암에게 비문을 청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전국 각처 188개 기문, 개인의 신도비 96편을 비롯한 비문이 6백여 편에 이른다. 몇몇 중복된 인물을 제외하더라도 비문만 보더라도 당대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뻔한 산천(山川)과 몇몇 역사적 사실로 전국 시, 도민의 노래나 교가를 작사한 예와 달리 깊은 학문의 성취를 비문에 그대로 담았다. 돌에 새긴 글은 곧 지역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산림정치도 영조, 정조 때의 탕평정치를 거치며 힘을 잃고 말았다. 아쉽게도 왕권 회복을 위한 탕평은 더욱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파탄을 맞았다. 바로 세도정권이다. 세도정권은 권력을 독점하고, 밑으로부터의 저항을 외면한 채 외세 의존적인 친청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지지기반이 미약한 정권이 취하던 행태 그대로였다.

이후 그들은 경화사족이라 부르며 모든 것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산림을 매개로 하던 지역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겼다. 2008년 뉴타운개발과 특목고로 집권했던 토건세력들처럼 동화 `시골쥐와 서울쥐'의 결말을 뒤바꿔놓았다. 앞선 2백 년 전 선조들의 패착은 결국 국권을 상실하는 결과를 맞았다.

우리 지역은 서울과 3일 거리를 반영하듯 `삼일치'라는 지명이 많다. 예로 따지면 서울의 사정이 실시간으로 들려오던 가까운 거리였다. 큰 고개를 넘거나 한참을 가야 했던 영남과 호남에 비해 서울의 바람은 체감 정도가 달랐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서울 양반들이 물러나 살기 좋은 곳이라 하였는가 보다.

최근 지역에 대규모 문화기반시설을 유치하려는 노력이 거듭됐다. 단체장이야 국비 확보라고 말하지만 이제 꼼꼼히 되짚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좋은 터를 내주고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지만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를 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곳간 열쇠를 누가 쥐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이 들어온다 해도 촌놈들이 다가가기에 쉽지 않다면 언감생심일 뿐이다.

지역의 역량이 부족하여 `국립'을 선호한다면 모르겠다. 그리고 양질의 문화 서비스도 물론 없진 않을 것이다. 찔끔 베푸는 은혜에 만족하고, 물론 거기에 기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수의 시민들에게 체감하는 혜택은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어찌 됐건 유사한 시설이 있고 나름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오히려 기존 시설에 더 관심과 지원을 하면 어떨까. 매양 촌놈들의 수준을 탓하기에 앞서 문간에 들어설 주인이 누구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시설 명칭에나 목맬 일이 아니다.

왜 우리가 웃분들의 인사적체와 부족한 수장고를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퇴임 후 고향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저잣거리에서 인사를 나누는 어른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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