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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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12.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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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수준(水準), 한자로 보자면 물의 높낮이다. 헤엄을 못 치는 사람은 한 길이 넘는 물에서 겁을 내지만,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물이 깊어야 물을 타는 재미를 느낀다. 낮은 물에서 노는 사람은 낮은 것만 보지만, 높은 물에서 노는 사람은 낮은 것만이 아니라 높은 것도 본다. 우리말에서 수준에 해당되는 어법은 ‘낮은 물, 높은 물’이다.
‘나는 그 사람 못 따라가겠어. 너무 높은 물에서 놀아.’ 이건 ‘너무 높은 데’ 산다는 이야기다. ‘우리같이 낮은 물에서 노는 사람이 어떻게 알아듣겠어.’ 낮은 물은 교육적인 수준, 경제적인 수준, 문화적인 수준이 낮음을 뜻한다.
여기서 ‘물’은 곧 일종의 사회다. 이런 뜻이 적극적으로 끼어 들어가 쓰이는 표현이 ‘사회 물’이다. ‘저놈, 뭘 몰라, 사회 물 좀 먹어봐야 철이 들지.’ 재밌게도 군대는 ‘밥’이고, 사회는 ‘물’로 그곳에서의 경험을 드러낸다. 다행히도 학교는 ‘물’이다. ‘가방 끈’으로 대변되기도 하지만 ‘대학 물 좀 먹어봤지’처럼 쓰인다. ‘낮은 물에서만 놀지 말고 좀 수준 좀 올려봐.’ 이렇게 물과 수준이 함께 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물로 수준을 뜻하는 것은 상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마다 수준이 있을까? 있으니까 말이 있겠다. ‘수준차이’라는 말이 경제적인 상황에서 많이 쓰여서 나쁘게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문화적 수준’이라고 말하면 갑자기 좋은 뜻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수준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다가는 차별이다 뭐다 해서 덤터기 쓰기 쉽지만, 적어도 문화와 예술로 나가면 수준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세계로 들린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도 수준에 대한 이야기다. ‘감식안’이라는 표현도 그렇다. ‘귀가 열렸다’는 것도 그렇다. 공연한 편집증이라고 폄하해도 어쩔 수 없고, 요즘말로 마니아 또는 오타쿠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어떤가?
종자기(鍾子期)라는 사람이 살았다. 기원전 3세기 춘추전국 시대 초나라의 나무꾼인데, 귀가 열렸던 것 같다. 백아(伯牙)가 한강변에서 거문고를 칠 때, 종자기가 이를 듣고 너무 좋아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하나는 음악가로, 하나는 관객으로 말이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종자기가 죽었다. 이후 백아는 거문고를 다시는 치지 않았다. 자기 음악을 알아줄 벗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는데, 무슨 음악이냐는 것이었다.
지음(知音)을 말할 때 애용되는 이야기다. 듣는 사람이 있어야 소리도 한다. 홀로 소리한다는 것은 지루하고 맥 빠지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수준을 높일 필요가 종종 있다.
나의 수준? 잘난척하자면 차(茶)는 좀 안다. 나는 시간에 따라 다른 차를 내놓는데, 빈속에 마실 수 있는 차와 밥 먹고 마실 수 있는 차가 다르기 때문이다. 속을 안 깎는 차는 발효가 많이 되어 진한 색깔의 차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것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먹던 차를 내놓는 사람은 좀 싫다. 그건 물을 내놓는 것이지, 차를 함께 즐기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 맛을 알면 자꾸 좋은 차를 내놓게 되어있다. 이건 나만이 아니다. 차의 품평이 제대로 나오면 차를 즐기는 사람은 더 좋은 차를 내놓게 되어있다. 음악가과 관객처럼 좋은 차에 대한 교감을 할 때 차 맛이 더 좋기 때문이다.
파도가 쳐야 신나는 서퍼들도 마찬가지다. 8미터가 넘는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은 정말로 높은 물높이, 곧 말 그대로 최고수준(最高水準)을 바라는 것이다. 큰물에는 큰 물고기가 살고, 작은 물에는 작은 물고기가 산다. (충북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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