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까레리나와 촛불
안나 까레리나와 촛불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12.0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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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리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소설 <안나 까레리나>를 다시 꺼내 읽다가 문득 맞은 12월, 축축한 겨울비로 마침내 문을 연 겨울의 문턱에서 2년 전 이맘때의 촛불을 생각한다. 톨스토이의 첫 문장처럼 그때 우리는,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로 광장으로 모인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닮은 모습이었다. 오로지 `나라를 나라답게' `박근혜 퇴진'과 `적폐청산'의 한 목소리로 닮은 모습이었으므로 이 땅의 국민임이 자랑스러운 행복한 세상이었다.

그로부터 2년, `사람이 먼저'인 정권을 탄생시켰고,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다짐에 들뜨기도 했다.

기대한 만큼 청천벽력 같은 일도 이루어져 남과 북의 두 정상이 판문점 분단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삼엄하게 서로를 적대시 했던 휴전선의 초소는 여러 개 사라졌으며, 남녘의 기관차는 지금 이 순간 북녘의 산하를 누비며 소통의 길을 만들 준비에 분주할 것이다.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길고도 짙었던 어둠의 질곡을 걷어내고 한 자리에서 만났으며, 교류에 대한 논의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진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촛불 그리고 2년. 광장의 촛불은 <안나 까레리나>의 행복한 가정처럼 서로 닮았으되, 지금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이유로 행복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서울 한복판 고시원에서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 스물여덟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을 때, 해외순방을 마친 대통령이 현장으로 달려나가 안타까워할 줄 알았다. 어쩌면 초심은 그때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득주도성장은 혁명적 전환이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경제적 약자들의 소득주도와 소비증대, 내수활성화로 이어지는 경로의 변화가 소득주도경제의 핵심이다. 잔뜩 배불린 재벌과 대기업이 잉여소득을 움켜쥐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지 않으면, 그리하여 그들이 무언가를 해주지 않으면 경제사정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구걸하는 자세로는 혁명을 완성할 수 없다. 재벌과 대기업에만 극도로 유리한 시장경제의 사슬을 끊고, 갈수록 크게 벌어져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그럴듯한 구호와 선언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최저임금 인상과 탄력근무제를 통해 저녁이 있는 삶을 희망할 수 있고, 그런 사회적 훈훈함으로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꿈이 일방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가. 이 땅에는 그런 꿈조차 꿀 수 없는 궁핍과 곤궁의 삶이 얼마나 많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누구누구는 무슨무슨 위원회의 장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공기업의 수장이 되었으며, 또 그 누구는 청와대에 입성했다는 수군거림이 수상하다. 곳곳에 투하되고 있는 낙하산에 대해 더 이상 이렇다저렇다 타박하지 못하는 것은, 이 또한 과거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체념에서 비롯된다. 뜻이 맞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더불어 일을 하겠다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그들이,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일은 사실, 흔적도 없고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수많은 민초들과 함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특권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강행군을 마치고 대통령이 귀국했다. 외교적 성과는 막중하다. 그럼에도 당장 눈앞의 민생과 청와대 직원들의 일탈과 어리석음은 외교적 평화만으로 대체할 수 없다.

다시 우리의 첫 문장을 “서로 닮은 행복한 가정과 더불어 저마다의 이유 또한 충분히 행복을 꿈꿀 수 있는 다복한 세상”으로 바꾸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자칫 때를 놓치면 다시 기회는 없다. 그만큼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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