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8개월의 기다림
13년 8개월의 기다림
  • 권진원 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 승인 2018.11.29 17: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낮은자의 목소리
권진원 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권진원 진천 광혜원성당 주임신부

 

과거 초등학생 때는 방학이 되면 으레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 댁을 찾아 한 달 정도를 보내고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어린 손주들을 반가이 맞이하시고 이런저런 옛이야기들을 들려주셨습니다. 연세가 13년 차이셨던 할아버지의 큰 형님 이야기를 하시면서 동네 훈장님이셨고 이미 13세 때 결혼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큰할아버지가 한일강제병합 전인 1905년 생쯤 되시니 당시에 조혼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대쪽 같은 성격 탓에 일찌감치 나라 잃은 설움을 한탄하시고 동족이 총칼을 맞대던 한국전쟁의 처참함을 보시고 피난 대신 고향 땅을 지킨다며 서당을 지키셨던 분이시라는 옛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이야기 중간에 동네의 몇몇 친구들과 지인들이 배를 타고 멀리 일본 땅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0-30대의 젊은 청년들이 동네에서 사라진 것인데 처음에 이국땅에 돈을 벌러 가려니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돈은커녕 생사도 알 수 없고 동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당시 어린 저에게는 특별하지도 않게 들리던 이야기였는데 후에 어른이 되고 보니 그것이 바로 조선인들을 일본으로 끌고 간 강제징용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당시에 한국에서는 굳이 고향 땅을 버리고 돈 벌러 먼 땅에 갈 이유가 전혀 없는 시기였다고 하시면서 그건 끌려간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강제 징용과 관련된 소송에서 2015년 7월부터 대법원에 계류되었던 것이 지난 9월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어 심리를 거쳐 기존 재판부에서 선고하기로 결정되었다. 강제 징용 피해자 유족과 당사자가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선고도 이뤄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올해 10월 30일 그간 13년 8개월간 이어온 소송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소송을 낸 피해자 4분 중 이춘식 할아버지 한 분만이 남아있었고 나머지 3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실 첫 번째 소송이 지지부진하자 두 번째 소송이 이어졌는데 당시에는 7분이 함께 동참하셨는데 6분이 돌아가시고 한 분은 생명이 위독하다는 방송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손해배상 1억원이라는 판결이 났지만 일본의 태도는 정말 악독하며 안하무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할지도 모르고 사과할 줄도 모르는 나라입니다. 독도 망언과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미 알고 있기에 새삼스럽진 않지만 또 화가 났습니다. 사람에겐 염치라는 것이 있어서 또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있어서 반성할 줄 알고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법인데 일본은 인간이 가지는 기본적 심정이 결여된 듯 보입니다.

특별히 같은 전범국인 독일의 경우와 너무 비교됩니다. 자신들의 전쟁범죄에 관해서 매번 진심 어린 사과를 합니다.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필요한 경우 매번 새롭게 거듭 사과를 합니다. 나치 독일의 강제노동에 관해서도 2000년 `기억, 책임, 미래 연방재단'을 설립해 우리 돈으로 약 6조원에 이르는 기금으로 160만명이 넘는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해왔습니다.

판결의 유일한 생존자이신 이춘식 할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94세이십니다.

얼마나 더 사실지 남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그리도 듣고 싶던 이야기로 마음 한켠의 응어리를 풀어버리시는 때가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진정 이번 기회에 일본이 태도를 바꾸어 자신들 만행의 역사에 진정으로 사과하고 피해자들에게 무릎 꿇어 사죄하며 반복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다짐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