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창(窓)
사람의 창(窓)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11.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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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첫눈이 왔다. 어두운 기운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새벽 산책길에서 나는 처음에 비로 내리다가 점차 싸락눈으로 변해가는 낙하를 희미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발견했다. 기온은 동이 틀 무렵에 더욱 낮아지고, 마침내 바람에 흩날리는 눈들의 자유로운 비행을 바라볼 수 있다.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대지는 눈이 제 몸에 닿자마자 형체도 없이 녹이고 만다.

밤이 가장 길어지는 동지가 될 때까지 새벽 산책길은 점점 더 어둠이 짙어질 것이다.

그 계절의 변화에서 지탱하기 위한 김장을 했다. 여전히 겨울채비의 큰일 김장은 습관으로 남아 있는데, 이맘때 꼭 해야 했던 창호지 바르는 일은 대부분 사라졌다. 햇볕 좋은 날 문짝을 떼어 내고, 물을 듬뿍 묻혀 묵은 창호지를 긁어낸다. 부엌에서는 밀가루로 풀을 쑤고, 새로 장만한 문창호지 몇 겹을 정성껏 바른다. 소녀 같은 감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할머니는 가을에 잘 말려 둔 나뭇잎으로 곱게 단장도 하고, 햇살에 잘 마른 창호지에서 울려 퍼지는 맑고 탱탱한 소리는 겨울 칼바람쯤은 너끈히 막아 줄 것처럼 기분이 좋다. 거기에 아기 손바닥만 하게 만든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는 바깥의 풍경.

아, 창문! 김장을 담그며 옛 추억의 겨울을 생각하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겐 여전히 동토(凍土)인 이 나라의 창문을 생각한다. 그리고 무려 1988년에 쓰여 진 작가 양귀자의 산문집 <따뜻한 내 집 창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는 탄식이 여전히 유효한 이 땅의 비루한 삶에 통분한다. 아! 어쩌다 세상은 이토록 모질게 불공평한가.

7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 간 서울 종로 고시원의 화재는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입신양명의 희망을 꿈꾸는 고시 준비생이 아니라 일용직 노동자로 근근이 삶을 지탱하던 홀몸의 중년들의 비참함이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게다가 희생자들은 대부분 한 달 방값이 불과 4만원 차이가 나는 창문 없는 방에 살던 `사람들'이어서 더 서글프다.

창문은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수단이다. 작가 양귀자의 말처럼 `따뜻한 내 집 창밖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고, 쓸쓸하고 아픈 나를 누군가 들여다보며 구조해 줄 수도 있는 신호체계이다.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단절의 공간에서,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난에 몸서리치며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도 철저히 격리되어 살아오던 이들의 죽음을 어찌 인간의 비극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위해 혼자 상점의 외판원으로 돈을 벌어야 했던 그레고르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하면서, 고단한 외로움에 감금의 고통까지 더해지는, 그러다가 아버지가 던져 준 사과에 맞은 상처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창 없는 방에 갇힌 듯 살아가던 중년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산울림의 김창완 원곡을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가요 <너의 의미>는 창문을 통해 그 아름다운 간절함이 전해진다.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그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 온 넌 향긋한 바람/ 나 이제 뭉게구름 위에 성을 짓고/ 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그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이라고 노래한다. 김창완은, 그리고 아이유의 `바람 드는 창'은 뭉게구름 위에 성을 짓는 일, 그리고 `쓸쓸한 뒷모습'은 간이역에 내려놓아야 할 슬픔이라고 애절하게 읊조린다.

종로 고시원에서 숨져 간 중년의 서러움은 한 달 4만원으로 끼니를 간신히 해결하거나, 어쩌면 그 곤궁한 돈이라도 착실히 모아 아주 작은 유리창이 달린 방을 갖겠다는 이루지 못한 꿈으로 분노의 눈을 부릅뜬 채 영원히 잠을 못 이룰지도 모르겠다.

방과 집들이 가진 자들에게 널려 있는 이 땅에서, 그들은 죽을 때까지 `먼저'인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사람이 먼저인'세상과 끝내 결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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