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8.11.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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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196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은 전통적 극작법에서 벗어나 연극 고유의 수법으로 인간존재에 접근했다는 찬사를 받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였습니다. 아일랜드 출생의 프랑스인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 문학상을 양분했던 시인·소설가를 제치고 수상자가 된 건 신선한 충격이었고 연극계의 큰 경사였지요.

그렇듯 사뮈엘 베케트는 현대연극사에 길이 남을 작가였고 연극인이었습니다. 대종을 이룬 사실주의 연극이나 자연주의 연극에 반기를 들고 내면의 생각과 사상과 초자아를 다룬 이른바 앙티테아트르(反 연극기법)라 불리는 반연극(反演劇) 또는 부조리극(不條理劇), 전위극(前衛劇)의 개척자였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의 무의미한 대화들과 우스꽝스런 몸짓과 무대설정으로 주목받으며 극 중에서 등장인물이 시간과 공간의 현실성을 잃고, 언어의 전달능력을 상실하는 등 행위의 의미를 해체당하는 부조리성을 연기했죠. 이런 연극 기법을 통해 관객들에게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목적 없이 표류하는 존재'임을 암시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런 기법과 사조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부조리극의 정수입니다. 베케트가 2차 대전 당시 남프랑스의 보클루즈에서 숨어 살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자신의 상황을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보편적인 기다림으로 내밀하게 그린 작품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였거든요.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의미 없는 대사와 단편적으로 축소된 인물과 배경 등을 통해서 현대인의 빈곤과 무기력함을 변형하여 표출했으니까요.

`고도'라는 인물은 끝내 등장하지 않고 단지 소년 전령을 통해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전갈만 보내는. 고도(Godot)라는 이름이 영어의 God와 프랑스어의 Dieu를 하나로 압축한 합성어의 약자라는 해석이 있기는 하나, 고도에 대한 정의는 관객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인 베케트조차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란 유명한 일화가 의미하듯이. 고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 블라디미르(Vladimir)와 고도를 기다리는 일을 힘들어하며 블라디미르에게 떠나자고 채근하는 에스트라공(Estragon)은 심약한 현대인의 모습이구요.

럭키의 주인으로 럭키를 짐승처럼 다루다가 2막에서 장님이 되는 포조(Pozzo)와 포조의 노예로 포조의 짐을 가지고 다니다가 2막에서 벙어리가 되는 럭키(Lucky)와 고도의 전령으로 1막과 2막 끝에 등장해 고도가 못 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지는 소년(boy)은 병약한 현대인들의 초상입니다. `그만 가자(에스트라공)/ 가면 안 되지(블라디미르)/ 왜?(에스트라공)/ 고도를 기다려야지(블라디미르)/ ?참 그렇지(에스트라공).'

나무 한 그루뿐인 어느 시골길에서 `고도'라는 인물과의 약속을 위해 무려 50년을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와 시간이 맞는지, 그리고 정말로 오긴 오는지조차 모르고 누구 또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 당장 목이나 매자. 아무도 오지도, 가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정말 끔찍해. 이 세상의 눈물의 양은 정해져 있지. 누군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누군가는 울음을 멈추겠지. 웃음도 마찬가지야. 습관은 우리의 모든 이성을 무디게 하지'블라디미르의 극 중 대사처럼.

그래요. 어제 만난 그 사람과 또 여전히 잡담을 나누고 기억조차 하지 못할 그냥 그런 이야기들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그러다가 만났던 사람인지 아는 사람인지조차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채 그럭저럭 살아가지요.

지금도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인가를 막연히 기다리며 사는 뭇사람을 생각하며 `그럼 갈까?/ 가자'로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반추합니다.

아무튼 인생은 연극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든, 파랑새를 찾던, 유토피아를 그리던. 주연으로 사느냐 조연으로 사느냐만 다를 뿐. 하여 애써 주연으로 살아가는 그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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