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나무들의 기운이 뿌리로 돌아가는 시기
풀과 나무들의 기운이 뿌리로 돌아가는 시기
  • 우래제 (전 중등교사)
  • 승인 2018.11.2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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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들려주는 과학이야기
우래제 (전 중등교사)
우래제 (전 중등교사)

 

음력 10월은 시제( 時祭, 時享)의 계절이다. 5대조까지는 집에서 밤에 기제사(忌祭祀)를 지내지만 5대 이상의 조상은 하루 별도의 날을 잡아 산소에서 지내는 것이 시제사이다. 어렸을 적 학교가 끝나면 정신없이 시제사를 지내는 선산을 향해 달려갔다. 멀리서 흰 의관을 차려입은 제관들이 보이면 한숨을 놓는다. 보통 문중 묘역이 있어 한 곳에서 산소마다 찾아다니며 시제를 지내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어쩌다 일찍 끝나거나 하교가 늦어서 흰 옷이 보이지 않으면 서운했다. 시제가 끝나면 떡과 과일, 전, 고기 등을 나누어 주는데 그 몫을 얻어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 생각을 하면서 평택의 시제에 참가하러 갔다.

그런데 축문에 今以草木(근이초목) 歸根之時(귀근지시)라는 구절이 나온다. 초목의 기운이 뿌리로 돌아가는 시기라는 뜻이다. 늦가을은 정말로 풀과 나무들이 뿌리로 돌아가는 시기인가?

하루해살이풀은 늦가을 된서리가 오기 전에 씨앗을 만들어 후손을 남기고 죽는다. 대표적인 것이 벼, 보리, 밀, 콩 등의 곡식과 강아지풀, 쇠비름, 명아주 같은 잡초가 이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여러해살이풀은 땅 윗부분은 죽지만 마, 칡, 튤립, 달리아, 고구마, 감자 등처럼 알뿌리에 최대한의 영양분을 저장해 겨울을 지낸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기르는 것은 캐어내어 얼지 않도록 보관한다.

나무들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대부분 잎이 넓은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릴 준비를 한다. 여름처럼 광합성을 할 수 없는데 잎을 달고 있으면 수분이 계속 손실되고 기온이 낮으면 나무가 얼어 죽을 수 있다. 넓은잎나무들은 떨켜를 만들어 물과 무기양분이 잎으로 가는 것을 막는다. 이때 잎에 있던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엽록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색소가 나타나는 것이 단풍이다. 그리고 내년에 새싹을 틔울 겨울눈을 만든다. 겨울눈이라고 겨울에 만드는 것이 아니고 겨울을 버텨내는 눈이다. 영양상태가 좋은 봄부터 만들거나 여름에 생장이 좋을 때 미리 만들어 둔다. 겨울눈은 식물에 따라 털이나 진액, 비늘 같은 것으로 잘 쌓아 추운 겨울에 얼지 않도록 보호를 한다.

그러면 낙엽이 지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는 어떻게 겨울날 준비를 할까? 이들 바늘잎나무도 전년도에 자란 잎은 떨어지고 올해 자란 잎만 남는다. 이들은 민들레 냉이처럼 세포 내 당분물질을 늘려 어는점이 낮아지도록 한다. 이러한 부동액(항 결빙물질) 덕에 세포 내부에는 얼음 덩어리가 잘 생기지 않고 세포 사이에 얼음이 생기면 세포 내 물을 빼내게 되는데 그러면 세포 내 농도는 더 높아지고 어는점은 더 낮아져 세포는 잘 얼지 않는다. 이렇듯 늦가을은 풀과 나무들이 추운 겨울을 보낼 준비가 끝나가는 시기다.

사실 모든 풀과 나무들의 기운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식물이 만든 씨앗이나 열매, 알뿌리, 겨울눈 등 내년에 다시 자랄 모든 것을 뿌리(조상)라고 본 것뿐이다. 이러한 뿌리가 양분이 되어 훗날 풍성한 초목으로 자랄 수 있게 해 주는 것처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는 부모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시제사 참여 인원이 점점 줄어든다. 어린아이들 몫이 아닌 어른들이 받던 커다란 봉송을 받아들고 떠나오면서 형식은 어찌 됐든 조상을 잊지 않는 그 정신만은 오래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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