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반추
11월의 반추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8.11.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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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층층나무는 여름을 휘어잡는다. 층층이 캉캉치마를 두른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보기에는 얌전해 보이지만 폭군이 되어 가지를 뻗어간다. 힘찬 기세로 옆의 다른 나무를 밀쳐내고 영역을 넓혀 나무들 사이에서 폭도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는 나무다. 무성한 잎은 햇빛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아 촘촘한 그늘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인지 그이는 농막에 사방을 둘러 층층나무를 심었다. 속성수인 데다가 그늘을 계산해서 선택한 수종일 듯싶다. 대나무의 빠른 생장을 알고 놀랐는데 심은 지 몇 해 만에 숲이 된 농막을 보고 또 이 나무의 생장속도에 놀랐다. 별명이 무색하지가 않다. 온통 우거진 응달 덕에 여름에는 따로 피서지가 필요 없다. 그이는 휴가철에도 서늘맞이하러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농막 예찬자가 되어 내내 여기에서 지내는 것이다.

여름에 기운을 다 써버린 층층나무는 가을로 접어들자 소심해진다. 화끈한 단풍나무가 먼저 홧홧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에 질세라 은행나무가 노란 물감을 진하게 잎에다 풀어댄다. 그 광경을 잠잠히 지켜보고 있다. 묵시의 시간으로 깊어진 나무는 서둘러 연한 감물을 들인다. 물이 들기가 무섭게 상강은 잎의 잔인한 낙화를 권고했을 터였다. 생을 위한 결단을 강요받은 나무는 폭군의 성격이 그러하듯 결심도 빠르다.

다른 나무들은 아직 줄기에 잎이 제법 남아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질이 급하여 입동에 이미 알몸이 되어 있다. 층층나무의 치마폭이 벗겨져 나가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나 있다. 일찌감치 겨울을 받아들일 채비를 끝낸 것이다. 미련을 두지 않고 포기할 때 포기할 줄 아는 현명한 나무다.

그이는 나에게 여름날의 층층나무로 서 있었다. 다른 나무를 제치고 가지를 뻗어나가 햇빛을 독차지하는 나무. 숲의 걸주(桀紂)인 당찬 나무. 여름에는 그의 그늘 밑에서 시원해하고 겨울에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를 쓰러지지 않도록 받혀주는 그런 나무였다. 언제까지나 그럴 줄로만 알았던 그이에게 건강에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갑자기 입동 소식을 전해 들은 나무들이 이러했을까. 순식간에 나는 얼어붙었다.

그날의 아침은 악몽이었으면 했다. 그이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고 눈이 감겨져 있다. 의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구안와사였다. 추운 날씨에 온종일 밖에서 일한 것이 무리였나 보았다. 전날에도 마을에 있는 상하수도 저수조 청소를 했다.

올해 들어 유난히 피곤해함을 알면서도 무심코 넘겼다. 내 책을 내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그이를 바라볼 여유도 없었다. 거기에 잔소리까지 얹었다. 인건비를 아낄 욕심으로 작업속도를 내라고 모질게 다그쳤다. 그이에게 나는 폭도였다.

11월이 호되게 나의 뒷덜미를 움켜쥔다. 하나에 빠지면 오로지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나. 누가 앓는 신음소리를 내도 고개를 돌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주위에는 팔방미인들이 많건만 나는 늘 함량 미달이다. 곁을 살필 배려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이기적인 나를 불러 세워 돌아보게 한 것이다.

순순히 섭리를 따르며 공존해가는 자연은 절대적 교리를 좇는 종교와도 같다. 자연의 계율인 순리다. 함께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세상의 얽히고설킨 인연의 숲에서 자주 칩거에 들어가는 나에게 순리는 일침을 박는다. 덜미에 꽂힌 침이 깊다. 사시나무 떨듯 내 치부가 오한으로 떤다.

11월. 나무들이 색색의 허울을 벗는 달. 결실의 인고를 다 끝낸 담담한 얼굴이다. 묵상의 혹독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동안거에 드는 11월에게 고해성사하리라. 오만한 폭도였음을 나지막이 고하리라. 유난히 춥고 긴 나의 겨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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