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밥상
가을밥상
  • 공진희 기자
  • 승인 2018.11.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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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이상한 일이다.

`나는 나무처럼 열매처럼 빛깔을 이루었고 결실을 이루었는가?'

고등학교 진학시험인 연합고사를 치르기 위해 친구 100여명과 함께 시험장 인근 숙소에 짐을 풀었다. 배정받은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 한 권이 눈길을 끌었다. 크기도 교과서보다 작고 두께도 얇아 무심코 그 책을 집어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던 손이 책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내일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책 속에 푹 빠졌다.

저자가 안병욱 전 숭실대 교수였다는 사실 외에는 기억나는 내용이 없는 그 책 속에서 단 하나의 문장만이 40년 세월을 뛰어넘어 갑자기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폭풍처럼 다가왔던 질문들이 오직 하나의 울림으로 살아남아 갑자기 지금 여기에서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벼 베기가 끝난 가을 들판에는 흰 테이프로 온몸이 돌돌 말린 볏짚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온몸이 타들어가는 무더위에 태양을 향해 고개 빳빳이 쳐들고 버티던 당당함. 허리가 휠 듯 쏟아지는 폭우와 바람을 피할 곳조차 없어 친구와 어깨동무하며 온전히 받아내던 처연함. 그 모진 세월을 버텨낸 파릇파릇한 어린 모는 인고의 결실을 이삭 안에 담아낸 황금빛 벼로 성장해 겸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껍질을 벗은 벼는 다시 쌀로, 밥으로 나를 먹여 살린다.

머리보다 낮은 담장 옆에 이파리를 다 떨궈낸 감나무엔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짝사랑하는 연인에게 속마음을 들켜버린 사춘기 소년의 뺨보다 더 붉은 열매는 나와 가족의 배를 채워주고 한겨울 까치밥이 되어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짐승을 먹여 살린다.

감나무 옆 공터에서는 할머니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며 배추와 무를 다듬고 씻어 소금물에 담근다.

닭장 밖으로 나와 해바라기를 하며 졸고 있는 닭은 달걀로도 모자라 제 살까지 먹을거리로 내어준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는 소중한 존재인 나는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내 몸 자체는 내가 숨 쉬는 공기를 만들지 못한다. 내 몸 안에서는 내 몸을 먹여 살릴 먹을거리를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나는 나 아닌 존재들의 도움과 그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존재한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가을 밥상을 마주하며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와 머릿속을 맴도는 그 문장을 다시 읊조려 본다.

`나는 자연이, 또 사회가 건네준 그들의 열매와 생명을 받아 먹고 살면서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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