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드너미 재
고드너미 재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18.11.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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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산속에 길이 명소가 되었다. 단풍길 나들이 삼아 떠난 곳이 고향에 있는 고드너미 재(보발재)이다. 단양군 영춘면에서 이 재를 넘으면 가곡면 보발로 이어지는 길이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산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예전에는 걸어서 다녔던 길을 지금은 차를 타고 다니니 고갯길이 힘들다 해도 몸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잿마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아래 펼쳐진 풍경이 탄성을 지르게 한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에 가로수 잎들이 때맞춰 곱게 물들어 눈을 호강시키고 있다.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이 재를 넘곤 했었다. 재너머 계시는 고모님 댁을 가려면 지나야 하는 길이다. 인적이 드물어 재를 넘자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마주치는 사람이 없을 만큼 한적했다. 할머니와 둘이 길을 걷다가 길섶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가슴이 움찔할 만큼 적막한 깊은 산중이었다.

고드너미 재를 지나려면 무섭고 힘들었지만, 마음은 고모님 댁으로 앞서 달려갔다. 한 굽이 두 굽이 땀을 닦으며 오르다 보면 잿마루에 올라서게 된다. 돌탑 비슷한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할머니께서는 그곳을 통과하려면 그래야 되는 것처럼 숨 고르기를 하시며 돌을 하나 집어 그곳에 얹곤 하셨다. 잿마루에서 고모님 댁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았다. 비알 밭에 옥수수가 익어가고 산골 다락논들이 펼쳐진 길을 내려가다 보면 용소동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모님 댁이 가까워 올수록 마음은 달떴다. 마당가에 있는 사과나무가 주렁주렁 사과를 달고 먼저 우릴 반겼다. 고모님은 시조부모님을 비롯해 4대가 한집에 사는 대가족 며느리였다. 고모님 슬하에 자녀들도 올망졸망 크고 있었고 조카들도 여러 명 있어 어른, 아이 워낙 식구가 많아 늘 큰일을 치르는 집 같았다. 식사 때가 되면 고모님은 여러 개의 밥상을 차려 내가는데 힘든 기색 없이 차분하게 식사준비를 하시곤 했다. 친정 살붙이가 왔다고 드러내고 내색을 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자늑자늑 집안일을 하셨다. 고모님 일하시는 부엌에 가서 옆에 앉아 있으면 조곤조곤 궁금한 친정 소식을 묻곤 하셨다. 하루나 이틀 묵어 푼푼한 정을 뒤로하고 집으로 갈 때는 언제나 섭섭했다.

고드너미 재에도 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근처 산에 벌목한 나무를 실어 나르기 위해 찻길이 닦였다. 어쩌다 운이 좋을 때는 트럭 기사가 재아래 마을이 있는 곳까지 우리를 태워 주기도 했다.

고모님도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 때면 고드너미 재를 넘어 친정에 오시곤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날 즈음 할머니 생신 때면, 고모님은 손수 시루떡을 쪄서 머리에 이고 오시기도 하고 갓 수확한 메밀로 국수를 뽑아서 재를 넘어오셨다. 맨몸으로 걸어도 힘든 고갯길을 고모님은 짐 보따리를 가지고 친정과 시댁을 왕래하시던 길이다.

산골 오지에 마을과 마을을 잇는 재가 해마다 가을이면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산마루에서 내려다보는 단풍 길을 보러 멀리서도 일부러 온다 하니 널리 소문이 난 모양이다. 속담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오십 여년을 훌쩍 지난 고드너미 재는 변함없이 그곳에 있다. 세월을 따라가신 할머니와 분꽃같이 곱던 고모님이 마냥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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