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처럼
가을처럼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8.11.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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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안희자 수필가

 

만삭의 가을이 몸을 풀었다. 누렇게 익은 곡식들이 출렁이던 들녘은 수확을 마친 볏짚들이 가을볕에 몸을 말리고 있다. 지난여름 폭염과 가뭄으로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진 대지를 바라보며 애타던 농부들의 가슴속도 단풍처럼 곱게 물들었으리. 결실을 보기까지 농부는 자식을 키우듯 애면글면 정성을 쏟았으리라.

가을 들녘은 황금빛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알곡을 내어준 뒤 고요히 휴지기로 들어간다. 자식을 키워낸 부모들은 안다. 실한 알곡을 거두기 위해 지난봄과 뜨거운 여름을 어떻게 견뎠는지를. 알곡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바람과 햇빛, 사람의 땀과 정성으로 키운 결실의 열매인 것이다.

농사는 인내이며 기다림이다. 봄이 오면 씨앗을 묻고 싹트기를 기다리고, 싹이 트면 솎아내고 거름 주고 기다린다. 여름이면 가뭄과 폭우를 견뎌내고, 가을이면 열매가 익어야 비로소 결실을 본다. 하지만 농부들만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저마다 뿌린 씨를 키우며 살아간다. 자신의 인생을 경작하여 결국 뿌리고 심은 만큼 결실을 보는 것이다. 인간관계뿐 아니라 연인과의 사랑도, 인생의 거대한 목표도 농사처럼 기다림의 연속이다.

얼마 전, 나는 삼십 여년 넘게 애지중지 키워 온 농사를 거두었다. 자식농사이다. 혼기가 꽉 찬 둘째딸은 결혼보다 직장 일에 몰두했었다. 그런 딸의 당당함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은근히 몸이 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대학 동기인 남자친구를 소개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나는 묻지 않았다. 인생은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요즘 젊은이들 사랑은 쉽게 불붙고 쉬이 식어버린다며 `양은냄비 사랑'이라 말한다. 딸의 사랑 이야기는 저녁놀처럼 아름답다. 6년여 동안 서로 지켜보며 묵은 사랑은 빛난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열매야말로 보석보다 값진 사랑이 아닐까. 딸에게 결혼은 기다림의 증표이기도 했다.

딸이 결혼하던 날은 종일 햇살이 따사로웠다. 양가 어머니가 촛불의식을 치를 때 행복을 염원하는 두 손은 떨렸다. 순정의 코스모스처럼 피어난 여린 꽃송이. 한 쌍의 선남선녀를 바라보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딸을 보면서 감회가 남다르면서도 흐뭇했다. 듬직한 아들을 얻었으니 이 또한 기쁨이다. 신랑 신부가 양가에 인사할 때 나는 딸을 살포시 껴안으며 “예쁘게 잘 살 거라.”귀엣말로 속삭였다.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나도 그랬다.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 형제·자매를 만나고, 이후 한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을 얻었다. 그 자식을 보듬어 키워 원하는 대학에 보냈고,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결실을 맺고, 결혼까지 이르러 보람이란 꽃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살면서 엄마로서의 삶은 고단했지만 이 순간, 마음은 가을처럼 풍요롭다. 농사도, 인생살이도 온통 기다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사처럼 돌보며 기다리다 보면 결실을 보듯, 이 가을 멋진 부부로 탄생한 딸의 인생 여정이 꽃길이었음 좋겠다. 평생 부부로 연을 맺어 첫발을 내딛는 그들이 아름다운 동행이 되길 소망한다. 인생에 어찌 행복만 있을까. 모진 역경도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법. 인간사도 농사짓듯 매사에 인내하고 기다린다면 세상은 황금빛 들녘처럼 풍요롭고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결실의 계절, 가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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