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고시원
종로 고시원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8.11.12 2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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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국장(천안)
이재경 국장(천안)

 

1978년 12월, 지금의 수능 격인 예비고사 시험이 끝난 후 서울의 학원에 다니려고 상경해서 처음 잔 곳은 다름 아닌 독서실이었다. 지금의 고시원인 셈이다. 대부분 서울의 종로 학원가 주변에 진을 치고 있었던 이들 독서실은 현재의 고시원보다 거주 환경이 더 열악했다. 1인당 책상과 걸상이 하나씩 주어지는데 옆 자리와 구분하려고 두께가 30mm밖에 안 되는 얇은 베니어합판(Veneer 合板)으로 칸막이를 쳐 놓았다. 공부하면서 옆 사람의 숨소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해 서울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첫날밤에 맞닥뜨린 독서실의 밤은 챙겨서 덮었던 군대 모포로도 견디기 어려웠다. 30평 남짓한 공간에 다닥다닥 붙은 20여 개의 책상에 연탄 난로 두 개가 고작. 그러든지 저러든지 한 지붕 아래 `동거인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책상에서 또는 마룻바닥에서 책을 보거나 잠을 청했다.

지금 고시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서울의 독서실은 1970년대 중반에 성행하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의 유명 학원들이 밀집해 있는 종각 전철역 근처에 많이 몰려 있었다.

주요 고객은 당연히 학생들, 특히 재수생 또는 3~4수생이었다. 지방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의 학원에 다니려던 청춘들이 하숙비를 아끼려고 비용이 최소 1/5 이상 저렴(월 5000원~1만원 정도)한 독서실에서 공부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하지만, 당시의 독서실은 법적으로는 지금의 고시원같이 잠을 잘 수 없는 곳이었다. 당시 교육청은 독서실의 개방시간을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30분까지만 허용했다. 그러나 지방에서 서울, 부산 등 대도시 학원가에 학생들이 몰리면서 독서실에서 잠을 재우는 불법 영업이 시작됐다. 당국도 애써 막으려 하지 않았다. 이용자들이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하숙집을 구하기 어려운 학생들이다 보니 불법인 줄 알면서도 엄포만 놓을 뿐, 적극적인 단속을 하지는 않았다.

동아일보가 그 무렵 서울의 독서실 실태에 관한 탐방 기사를 썼는데 그 표현이 다음과 같다.

`~이처럼 많은 독서실이 탈선 운영되는 것은 도심지 독서실의 경우 대부분의 이용자가 지방 출신 재수생이거나 3수생으로 하숙비를 따로 물지 않고 독서실에서 잠을 자려는 사람이 많은데다 철야 영업을 않고는 이용자들의 인기를 끌 수 없기 때문인데, 긴 책상에 합판으로 칸막이를 설치하고 공부하는 한편에서는 버너 등으로 학생들의 밥을 지어먹고 있어 화재의 위험도 크다.'(1977년 10월 29일)

독서실은 이후 불과 5년 새 4배 가까이 급증했다. 1984년 경향신문의 기사를 보면 `서울시 소방본부가 독서실 896곳을 전수 조사해 이중 화재 방지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177곳을 적발해 개수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 있다. 법을 어긴 업소가 무려 20%나 됐다.

지난주 발생한 서울 종로의 고시원 화재 참사로 또 안타까운 목숨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스프링클러를 비롯한 소방 안전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게 또 사고를 키웠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알고도 못 막는' 우리의 취약한 재난안전시스템. 재난 공화국이란 오명을 언제까지 달고 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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