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 이상애 미술학 박사
  • 승인 2018.11.0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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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애와 함께하는 미술여행

 

이상애 미술학 박사
이상애 미술학 박사

 

히:프랑코씨 당신이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했으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내가 당신을 돕겠소. /프:고맙소, 히틀러씨. 그런데 어떻게 나를 도우실 건가요? /히:그건 걱정 마시오. 내게는 콘도르 비행단이 있으니 성능도 시험해 볼 겸 게르니카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할 생각이요. 대신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시오. /프:그 부탁이라는 것은 뭔가요, 히틀러씨? /히:내가 얼마 후에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킬 것인데, 스페인에 있는 유대인을 모두 나에게 넘기시오. /프:좋소. 그리하겠소.



1936년 스페인의 3년간의 내전에서 왕당파의 수장인 프랑코가 정권을 장악하자, 이듬해인 1937년 4월 독일의 나치군비행단은 민간인 거주지역인 스페인 바스코 지방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의 상공에서 3시간 동안 35t의 폭탄을 퍼붓는다. 때마침 게르니카는 장날이어서 사상자가 수천 명에 이르렀고,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더구나 나치군은 비행기 폭탄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군사기지도, 주요도시도 아닌 마을에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 세례를 그대로 받으며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야만 했던 게르니카의 민간인들! 사랑하는 이들을 한순간에 잃고 그리고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봐야만 했던 이들!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던 공화당 정부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을 위한 벽화로서, 이날의 참상을 그릴 것을 피카소에게 의뢰한다.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피카소는 자신의 고향이 나치에 의해 폭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그림을 그리는데, 세기의 걸작인 <게르니카>는 이렇게 탄생한다.

한눈에 보아도 화면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고통으로 얼룩진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울부짖는 이들의 절규이다. 절규, 절규, 그리고 또 절규…. 한순간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그리고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목도 해야 하는 이들의 절규가 들리는듯하다.

파리의 만국박람회가 끝난 후 <게르니카>는 유럽 순회전을 하지만 정작 고국인 스페인에서는 전시회를 갖지 않았다. 내전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프랑코가 집권한 스페인으로 작품이 가는 것을 피카소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1973년 피카소는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는데 프랑코의 독재가 끝난 뒤에 작품을 스페인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고 1981년에야 비로소 <게르니카>는 고국의 땅을 밟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중 피카소가 나치가 점령하고 있던 파리에 사는 동안, 한 독일 장교가 그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게르니카의 사진을 보고 피카소에게 묻는다. 독일 장교 : 피카소씨, 당신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이오? /피카소 : 아니오. 이 그림은 당신이 그린 것이오. 그렇다. <게르니카>는 피카소라는 화가의 손을 빌리기는 했으나, 전쟁은 일으킨 자의 그림이 아니겠는가? 나치군이 스페인 땅에 그린 전쟁참화 <게르니카>는 한 도시의 참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지구상의 어느 곳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미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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