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사직동의 지명 유래와 의미를 찾아서
청주 사직동의 지명 유래와 의미를 찾아서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8.11.07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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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필자는 역사교사로 20여 년을 학교에서 3학년 담임만 했기 때문에 수학여행을 한 번도 못 가 본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기회가 되어 장학사로 7년간 근무를 하였는데, 행정 업무의 미숙으로 실수와 허점이 많아서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람 있는 일이 있다. 바로 역사교육 자료를 개발하여 학교에 보급한 일이다. `길 끝에서 만나는 충북의 문화 이야기'를 시리즈로 발간해 학교에 보급하여 학생들의 체험활동 자료로 활용하도록 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한 마음이 든다.

많은 학생이 경주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알면서 정작 우리 고장의 `탑동'에 고려시대 석탑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탑동'이라는 지명도 마을에 이 탑이 있어서 생긴 것도 모르는 바보(?)를 더는 만들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뜻있는 교사들이 뭉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적들을 발굴하고, 체험학습 자료로 재구성하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에서 우리 고장의 지명 유래에 관한 책 `땅이름이 들려주는 지혜와 추억'은 우리의 뿌리를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책이라서 더욱 보람을 느낀다.

우리나라 주요 도시에 가장 많은 지명이 바로 `사직동'이다. 청주의 사직동은 본래 사창리에 속했는데 1963년 사창리 일부를 분할하여 사직동이라 이름하였다. 사직동의 `사직'은 이곳에 있었던 사직단(社稷壇)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직단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곳인데, 지금의 사직동 현대미술관 뒤쪽 공원에 있었다. 옛날에는 매년 2월과 8월에 청주목사가 제주가 되어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1910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제사를 폐지하면서 안타깝게도 사직단도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1955년에 세운 충혼탑이 있으며 입구 한쪽에 천지신단이라는 작은 제단과 사직사거리에 최근에 만든 사직단 표석만이 남아있다.

역사드라마에 “전하! 종묘사직을 보전하소서!”라는 대사가 나온다. 여기서 종묘사직을 잘 지킨다는 말은 곧 나라를 잘 지키고 다스려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사직이 있었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신(社)과 곡물신(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따라서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농경이 가장 중요한 산업 기반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직을 잘 지키는 일이야말로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청주 사직동의 유래가 된 청주의 사직단은 고려 제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난을 갔다가 난이 평정된 후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주 사직산 기슭에 사직단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현대 사회에 토지신과 곡식신의 이야기는 진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존적 자아의 성찰 없는 혁신과 혁명은 재앙을 부를 뿐이다. 역사적 정체성과 기본부터 튼튼하게 다진 후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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