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윗돌 밑에 묻어둔 죄
바윗돌 밑에 묻어둔 죄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18.11.06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주인 없는 빈집은 이제 덩굴 식물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담쟁이와 환삼덩굴은 자신들의 잎으로 집 외벽을 서서히 덮어놓고는 가을 물을 들이는 중이다. 처음부터 그곳이 제자리가 되지는 못했었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어느 날부터 그렇게 왕성하게 기어올라 덩치를 불려 놓았을 터였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심이 끊기게 되면 다른 무언가가 그곳을 채우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듯하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죄를 저질러 놓고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워 내팽개쳐 둔다면 그 마음자리에는 더욱더 끔찍한 것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십여 년 전, 러시아로 여행을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여행 일정 중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생가와 그가 유형살이를 했던 감옥을 들러 보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된 `죄와 벌'.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읽어보리라 생각했던 책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까마득히 잊었다가 요 며칠 동안에 다 읽었다. 소설은 허구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체험, 사상은 그 속에 스며 있을 수밖에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예전에 다녀왔던 그의 유형살이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라스콜니코프', 그는 법학을 공부하는 소도시 출신의 청년이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 두어 번 이용했던 전당포 노파와 노파의 여동생까지 끔찍하게 죽이게 된다. 그리고 그 집에서 가져온 귀금속과 지갑을 어느 집 담 밑의 바윗돌 밑에 숨겨 둔다. 그 후 꽤 여러 날을 공포에 휩싸여 떨다 의식 불명 상태가 되곤 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죄를 후회한다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 노파를 죽인 것은 이 세상에 해를 끼치는 이(蟲)를 죽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은 이후 제 발로 경찰서로 들어가 자백을 하고 유형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바뀌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자신의 삶을 극도로 몰아간 것일까. 그의 환경, 아니면 시대적 절명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책임져야 할 의무감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에는 `라스콜니코프'와 같은 인물들이 있다. 그의 여동생 두냐의 약혼자 루쥔, 두냐가 가정교사로 있던 집의 가장 스비드리가일로프다. 그들은 자신들이 휘두르는 돈과 권력 앞에 복종하는 인물들에 대한 억압이나 살인을 악의 산물로 치부하며, 정당화시킨다. 하지만, 두냐의 순결한 마음과, 사랑을 통해 둘은 죄를 뉘우친다. `라스콜니코프'또한 가족들을 위해 몸을 팔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순결한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다시 삶을 꿈꾼다.

우리는 누구나 크건 작건 죄를 짓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한 뉘우침, 반성이 자신을 올바른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고, 은폐시키려는 일련의 사건들 앞에서 과연, `벌'은 무엇일까. 자신이 세워놓은 그릇된 가치관의 아집에 갇혀 자유롭지 못하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벌'은 아닐까. `라스콜니코프'가 어느 짐 담 바윗돌 밑에 묻어 둔 그 귀금속처럼 말이다. 지갑 속에 돈들이 다 썩어 가도록 열지도 찾아가지도 못하는 그것은 그 자신이다. 고통으로 순간순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견디기 힘든 `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두냐와 소냐라는 두 여인의 진실 된 마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며 끝낸다. 이 순간 어디에서 수많은 죄가 생겨나도 우리 사회가 견뎌내는 것은 그러한 진실과 사랑이 있어 가능한 것이리라. 우리 이제부터라도 바윗돌 밑에 숨겨진 서로의 마음을 열어 주면 어떨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