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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1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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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장 동림 오국진
강 태 재 <논설위원·직지포럼 대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 동림(東林) 오국진(吳國鎭) 선생이 지병악화로 기능수행에 어려움이 있어 전수관 운영 포기서를 제출. 청주고인쇄전수관을 폐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수관까지 폐쇄할 정도인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워낙 대꼬챙이 같은 성품이니 구차한 모습을 보이겠는가만 금속활자장(金屬活字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주인공인 만큼 그동안에 이룩한 성과를 정리하여 체계를 세우는 일이며. 후계자 양성이며. 아직 할 일이 많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가 이룩한 크나큰 업적은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 고장에서 직지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몸으로 금속활자를 재현해 냄으로써 직지와 금속활자 연구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만약에 동림이 아니었다면 금속활자장이라는 장인 영역이 생겨났을까 물론 직지에 대한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지역각계인사들. 특히 나기정 전 청주시장을 비롯한 관련분야 전문가그룹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동림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오국진은 한학자였던 조부에게서 한자와 글쓰기를 배웠고. 대전공고 졸업한 다음 설계사무소. 주물공장. 충남도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에게 서각을 배웠고. 서예가 우송 이상복 선생에게 서예를 사사하였으며. 이철우 선생에게는 주물기법을 공부함으로써 금속활자 직지를 만나도록 정해진 운명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1972년 직지를 만나게 된 그는 활자주조법에 대한 고문헌연구와 거듭된 실험을 통해 밀랍주조법을 터득했다. 1986년 마침내 직지 하권의 떨어져나간 앞장을 뒷장과 똑같은 서체와 방식으로 채자(採字)하여 복원하는데 성공했으며. 월인천강지곡.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복원하는 등 끊임없이 금속활자 연구에 몰두하면서 국내외적으로 금속활자 재현 시범. 전시회 작품 출품. 언론매체를 통한 다양한 활동 그리고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금속활자장이라는 분야가 각자(刻字)와 같은 섬세한 손길이 요구되는가 하면 쇠를 녹이고 뜨거운 쇳물을 다루는 힘들고 복잡한 공정이기에 여간해서는 이를 배우려는 후계자가 별로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몇 사람의 이수자 가운데 금속활자장 전수조교 지정을 받은 임인호씨가 괴산 연풍 공방에서 정진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임 조교가 스승 동림 선생이 세운 금속활자 주조법 체계를 이어받아 금속활자장의 맥을 살려 나감은 물론 고인쇄술 연구의 수준을 높여나가야 될 것이다.

한편. 청주시에 따르면 고인쇄전수관 폐쇄에 따른 후속조치로써 청주고인쇄박물관 인근에 금속활자 공방을 설치. 금속활자 주조방법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금속활자 공방을 따로 설치하기 보다는 직지문화특구 지정여부를 봐가면서 특구 내에 대단위 직지문화공간을 조성하고. 이 안에 금속활자 직지의 모든 것을 관람자가 직접 보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도록 금속활자장 등 금속활자 인쇄 일관공정을 설치하자는 것이다. 현재 고인쇄박물관 직지 제작과정 전시공간은 너무 협소해 많은 인원이 관람하기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욕심 같아서는 흥덕사 터와 인접한 흥덕초등학교를 더 좋은 자리로 이전하고. 그 시설을 리모델링하여 공방 외에도 다양하게 활용. 명실상부한 금속활자 인쇄의 메카를 조성하면 국내외 문화관광산업수요에도 부응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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