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번 굽이쳐도 한 곳으로 흐르더라
만 번 굽이쳐도 한 곳으로 흐르더라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 승인 2018.11.0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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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늘 마음속으로, 한 칸 사우를 환장암의 뒤 왼쪽에 건립하고 조그만 위판(位板)에 `만력신종황제, 숭정의종황제'라 쓰고서 봄가을로 마른고기와 빚은 술로 제사를 드리되 아무쪼록 정결하게 하고, 오직 축사(祝辭)만은 불가불 성대하게 칭송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네. 이 일에 대하여 그와 같이 마음에 경영하여 온 지는 오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무슨 한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우암 연보에 실린 만동묘(萬東廟) 건립 배경이다. 1689년 사약을 받기 직전 문인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남긴 말이다. 명나라 두 황제에게 제사하여 만력 연간 재조(再造)의 은혜와 숭정 연간 사사(死社)의 의리를 축원하려는 뜻이었다. 이 유명에 따라 1704년(숙종 30) 화양동에 만동묘가 들어섰다. 이때는 바로 숭정제가 1644년 순국한 지 회갑년에 해당한다. 마침 이해 왕의 명령으로 창덕궁 내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신종제를 제사 지내기 시작하였다.

만동묘는 당초 현종 때 천안 사는 이중명(李重明)이 처음 만력황제를 제사 지내자 한데서 비롯한다. 그런데 하필 만동(萬東)이라 이름 붙였을까. 만절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말이다. 중국 황하(黃河)가 여러 번 굽이쳐 흘러도 마침내는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곧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중국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선조(宣祖)가 명나라에 올린 글에, “일편단심 북신(北辰)을 향하는 정성은 만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惟其一心拱北之誠 有似萬折必東之水]”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글은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지었다.

그래서인가 이정구의 묘소가 있는 가평 조종암(朝宗巖)엔 1683년(숙종 10) 이미 만절필동의 글귀를 새겨놓았다. 이해 명나라 사람 허격(許格)과 가평군수 등이 명 의종의 친필인 `사무사(思無邪)'선조의 친필, `만절필동 재조번방(再造藩邦)'효종의 시를 우암이 쓴 `날은 저물어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은 마음에 있네[日暮途遠 至痛在心]'를 바위에 새겨 추모의 장으로 만들었다. 남이섬만 있는 줄 알았던 가평 골짜기에 대명의리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성지가 있다.

우암은 명나라 의종황제가 보낸 원병에 따라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우리나라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 백성들의 한 터럭조차 황은(皇恩)이 아닌 것이 없다는 글은 신념을 넘어 삶 자체였다. 화양구곡 제4곡 금사담과 제5곡 첨성대 아래 바위에 글을 새겨 대명의리의 해방구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것들과 짝한 만동묘는 어쩌면 화양서원보다도 화양동의 본뜻을 드러낸 곳이다.

하지만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 외척이 집권한 세도정권은 이미 친청(親淸) 정책으로 전환한 지 오래이고 보니 만동묘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대명의리를 신주 떠받들 듯하던 많은 호론(湖論)들의 눈치를 보다가, 1865년 슬그머니 훼철하였다.

2004년인가 수십억을 들여 만동묘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철종과 고종 임금 때를 거치며 제일 먼저 철폐한 사우가 만동묘인데, 그런 역사성을 무시하고 다시 복원하다고 하니 무슨 곡절이 있나 싶었다. 역시나 관광자원을 활성화하려는 의미란다. 그즈음 만동묘 훼철도 역사인데, 그걸 우리가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몰역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만동묘를 찾기 위해 화양구곡을 찾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라도 볼거리가 더 늘었다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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