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있는 집
친구가 있는 집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18.11.0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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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무슨 카페이름인 줄 알았다. 한적한 국도변이고 주변의 산세도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노라니 윗줄에 자그마한 글씨로 요양원이라는 표기를 거들고 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애잔함이 밀려와 눈을 감아야 했다. 친구가 있는 집이라는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옅은 침묵이 뒤따라 왔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는 좋다. 그만큼 가깝고 필요한 존재이다. 친구를 따라가는 길이라면 누구든 외롭지 않고 힘들지도 않을 거라는 추측처럼 지금 저곳이 그런 곳이란 말인가. 한편, 요양원이란 이름을 무겁게 보이지 않으려는 배려인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나오면서 골똘한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지금 저 현판이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기에.

그곳을 지나며 나름대로 밑그림을 그려본다. 알 수 없는 우울한 색채가 하나둘씩 하늘 위로 떠오르고 있다. 친구가 있는 집일지언정 정적만 쌓여 있을 것만 같아서다. 이런 내 생각이 편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곳을 칭하는 친구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불편한 육체를 돌보아 주는 곳일까, 또는 외로움을 덜어주는 곳일까 하고 헤아려 본다. 그곳에 담겨져 살아가는 삶 자체가 어쩌면 미세한 정물과도 흡사한 것 같아 머릿속이 스산할 뿐이다. 수년 전 친정어머니의 삶도 그러했기에.

늦가을이다. 발끝에 부딪히는 젖은 낙엽의 자태마저 소리를 낮추고 있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오묘한 것을 발견했다. 미처 끝나지 않은 들꽃의 영화가 군무를 펼치고 있었다. 그것도 형형색색들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도 오래 살아남겠노라는 무언의 직시로 들려왔다.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보일 듯 말 듯 낙엽 속에서 까치발을 들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작은 꽃들, 무성한 서리가 내려야 스러질 테지만 아직은 꼿꼿해서 신기할 뿐이다.

바로 그 모습이었다.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은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도 신성하며 감당할 스스로의 몫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본다. 현재를 살고 있다 해도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을 불허하지만 꿈은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 꿈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아쉬움을 남길 만큼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 세상의 나이를 논하지 말고 거울처럼 내면이 맑은 후회 없는 그런 인생이길 바라면서.

곁에 있는 자연이 고맙다. 숨 쉴 수 있는 공기, 햇볕과 바람, 발끝에 차이는 작은 돌멩이마저 친구인 듯 고맙다.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갈지라도 가끔은 이렇게 온전히 혼자가 되어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도 친구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라 여기고 싶다. 숨 쉴 수 있어서 고맙고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이 있어서 다행 아니던가. 이 모든 조건이 친구가 되기에 충분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친구가 되어야 한다. 손 내밀어 주는 자세, 낮은 편견마저 거두고 따뜻한 마음이 되어 세상 속으로 함께 머물러 갔으면 좋겠다. 우선 나부터 친구가 있는 집을 두어야겠다. 비바람을 막아주듯 스스로의 영혼을 보호해줄 마지막 보루를 지켜가겠다는 뜻이다. 그 길은 건강을 지켜 가야하고, 의식이 시들어가지 않도록 마음 밭을 일구는 일에 애쓰며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 어디에 있든 친구와 함께 가는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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