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 안 돼 - 법정 5
울면 안 돼 - 법정 5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10.3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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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자는 당시 철학자 가운데에서는 노자를 그래도 가장 높게 평가하는 데도, 가끔씩은 노자를 비난한다. 장자가 제일이라서 그런지, 말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지, 아니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서 그런지, 뜬금없이 그런다.

주인공은 노자의 친구다. 등장하는 데가 내 편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앞 7편 가운데 세 번째인 `양생주'(養生主) 편이다. 그러니 믿을만할 뿐 아니라, 가중치가 있는 구절이다.

노자의 친구 진일(秦佚: 편안할 일佚과 잃을 실失은 함께 쓴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이 들어간다)이 노자의 문상 갔는데, 세 번 곡하더니 그냥 나와 버린다. 제자가 묻는다. `아니 선생님의 벗이 아닙니까?'그가 답한다. `그렇다.'`그런데 조문을 이렇게 하십니까? 이래도 됩니까?' 여기서 진일의 속마음이 나온다. 풀면 이렇다.

그렇지.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내가 들어가서 곡을 하려는데, 늙은이는 곡하기를 제 자식 곡하듯 하고, 젊은이는 곡하기를 제 어미 곡하듯 하고 있지 않은가. 노자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노자가 반드시 그렇게 말하라고 하지는 않았을망정 그렇게 말한 것이고, 그렇게 곡하라고 하지는 않았을망정 그렇게 곡하게 한 것이지. 이는 자연스러움에 배반하는 것이자,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빠지게 하는 것이네. 어떻게 몸을 받은 것인지 잊어버리는 것을 옛사람들은 `하늘을 어긴 형벌'(遁天之刑)이라고 불렀네. 알맞게 와서 선생의 시절이 되고, 알맞게 가서 선생의 순서가 된 걸세. 시절에 편안해하고 순서에 맞추는 것, 슬픔과 즐거움이 들어올 수 없는 것, 옛날 사람들은 이를 `하느님이 매달아 놓은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것'(帝之懸解)이라고 불렀다네.

여기서 장자의 `현해'(懸解)라는 유명한 관념이 나온다. 매달려 있다가 풀려난다는 것이다. 좋은 예가 꼭두각시다. 나무로 깎은 꼭두각시에 줄을 이어 인형극을 한다. 꼭두각시를 괴뢰(傀儡)라고 하니 괴뢰극이다. `북한괴뢰군'할 때의 괴뢰다.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뜻에서. 그들은 우리를 미국의 괴뢰라고 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꼭두각시 같아,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따라 춤추고 노래하다 죽는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도 나온다. `맥베스'5막 5장이다. “인생이란 한낱 걸어다니는 그림자, 불쌍한 광대들, 무대 위에 서 있을 때는 장한 듯이 떠들어대지만 그다음은 고요. 그것은 바보들의 이야기. 광포와 소란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

`줄에서 풀린다', 죽음으로서야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유라는 표현이다. 산다는 것은 줄에 매여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신이든 숙명이든 간에 우리는 질질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적어도 육신이 있는 한, 배고파서거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아니면 남에게 부림을 받아서거나 남을 애써 부리기 위해서라도 그 끈을 풀어버리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의 육체성이야말로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굶주림은 비극이 되고, 허겁지겁 배를 채우면 희극이 된다. 밥을 못 먹으면 우리네 삶은 비극이 되고, 밥을 너무 많이 (처)먹으면 우리네 삶은 희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이란 단어는 거의 우리의 육체성과 관련을 맺는다. 삶과 죽음은 물론, 하다못해 우연히 일어난 교통사고까지도.

법정 스님이 죽었을 때 운집한 신도들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스님이 열반에 들었는데 우는 것 아니라고. 제자들은 무심하게 법정을 태웠다. 아주머니들이 엉엉 울었다가는 노자처럼 욕먹을까 봐 그랬나 보다. 말은 안 했어도 정을 남겼다고.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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