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물든 거기
추억이 물든 거기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8.10.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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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인데도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가 밀려온다. 이 가을, 소나기를 머금은 먹구름은 바람에 몸을 얹어 더 가까이 내려온다.

얼마 전, 며칠간의 교육 그날도 첫날부터 비가 내렸다. 딱히 숙소를 정하지 못해 이용이 편리한 찜질방에서 숙박해야 했다. 현란한 오색 빛의 네온간판의 고급스럽고 럭셔리한 대리석건물의 찜질방, 범상치 않은 외관 숙식을 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짧은 순간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여탕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 옛날 감성을 그대로 간직한 여탕 탈의실 내 나무평상, 그 위에 오래된 대바구니에 소금과 후추 그리고 이쑤시개 통하나, 낡은 쟁반에 구운 계란과 김밥이 나란히 줄 맞춰 있다. 반들반들 기름옷을 입고 송송 참깨를 덥고 길게 누워있는 김밥, 노란 단무지가 삐죽하니 얼굴을 내밀고 그 옆에 우엉도 햄도, 도톰한 계란지단도 쭉 삐져나온 김밥꽁다리는 예전 소풍 때 먹던 기억으로 도리깨침이 인다.

이곳은 제대로 잘 차려진 밥상이 아니다. 각자 먹고 싶은 만큼 접시에 담아다 먹는 거다. 식성에 따라 계란은 소금과 후추를 적당히 썩어 찍어 먹으면 그만이다. 구운 계란이 이천 원에 세 개라지만 누구도 숫자를 세거나 확인하지 않는다. 무인자판처럼 먹고 나서 계산하면 그만이다. 벽걸이 선풍기도 털털거리며 돌아가고 헤어드라이도 예전 방식대로 네모진 통이 동전 한입을 꿀컥 삼켜야만 윙 거리며 뜨거운 바람을 토해낸다.

건물 내에는 대형할인점은 물론 스크린골프샵, 헬스장 등 다양한 시설이 잘 갖추어진 건물임에도 찜질방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극과 극을 달리는 풍경이다. 마치 90년도 동네목욕탕분위기다. 이런 언밸런스 같은 찜질방은 도심 속의 또 다른 시골풍경이다. 모두 다 세련된 최신시설로 영업하지만 찜질방은 나름 예스럽고 촌스럽지만 고집스럽게 복고풍으로 운영을 하는 거다. 어쩌면 빛살처럼 빠른 경쟁사회 앞에 수더분하고 친근한 이웃사촌처럼 그렇게 맥을 이어가는 게 아닐까.

십 년을 뒷걸음친 찜질방, 소박함이 묻어나는 경영 방침이지만 그런 분위기연출은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간에 그들만의 경영방침으로 현실의 발맞추는 맥락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스마트한 세상 전자시스템에 어색한 나처럼 조금 불편하지만 내 집처럼 편한 곳, 이것이 경영방침인듯하다. 이를테면 대량구매고객 즉 VIP 고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고객의 수를 늘리는 방법도 또 하나의 마케팅전략. 소수 인원보다 모두가 모자람 없이 흡족할 수 있도록 가득 채워 부족함 없이 만족시켜주는 일처럼.

밤낮없이 언제나 훤하게 대낮 같은 도심, 그리움에 허기가 느껴질 때엔 도심에 살면서 고향에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다. 서로 마음이 동하니 비록 촌스럽고 낡은 평상을 간직한 찜질방일지라도 판도라상자처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이튿날도 자연스럽게 세련되고 럭셔리한 건물 속에 시골스런 찜질방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편안하다. 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한다면 난 여름을 막 지나 가을 문턱에 서 있다. 나이가 들면서 옛것이 아름답고 보물처럼 여겨진다고 하더니 내가 딱 그 자리에 서 있나 보다. 지나간 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찜질방이 편하고 아늑한 걸 보면 말이다.

빗방울도 바람도 떨어진 낙엽조차도 어여쁜 이 가을, 영원한 손님도 없고 영원한 주인도 없는 세상 하얀 백지 위에 스케치하듯 또 하나의 추억의 밑그림을 그렸다. 사람은 추억을 그리며 산다. 누구나 가슴 한쪽에는 크고 작은 소중한 추억을 담은 주머니가 있어 언제든지 귀한 추억을 꺼내 본다고 한다. 황홀한 로맨스의 흑백영화처럼 아련한 이 가을날 젖은 나무초리에 물비늘처럼 더 반짝거리는 거기, 오늘 난 잔잔한 춘풍처럼 따스하게 내려앉은 추억이 물든 그곳을 가만가만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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