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회초리
아버지의 회초리
  • 임성재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2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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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논단
임성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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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체격의 아버지는 언제나 무서운 존재였다. 아버지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무뚝뚝한 아버지나 나의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아마 어려서 아버지에게 호되게 맞았던 기억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에게 처음 매를 맞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학교에 가는 길목에 먼 친척 아저씨가 운영하는 약국이 있었다. 그 집에는 나와 같은 학년의 딸이 있어서 가끔 하굣길에 들러 숙제를 같이하거나 간식을 얻어먹으며 놀다가 집에 가곤 했었는데, 어느 여름날 집에 가는 길에 하도 더워서 시원한 물이라도 얻어 마실까 하고 약국에 들어갔다. 하필 그날따라 아저씨만 약국에 계시고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나오려는데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10환짜리 지폐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돈을 들고 나와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꽈배기를 사먹으며 의기양양하게 집에 들어갔었다.

난생처음 큰돈을 만졌으니 얼굴에 쓰였었나 보다. 금방 들통이 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걱정 끝에 퇴근하시는 아버지께 고하셨고, 나는 즉시 아버지에게 불려갔다. 언제 준비하셨는지 아버지는 회초리를 드시고 돈의 출처를 캐물으셨다. 사실대로 자백했고 종아리가 터져서 피가 날 때까지 맞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깜깜한 밤길을 걸어 아저씨 댁에 가서 돈을 돌려 드리고 돌아왔다. 저녁도 못 먹고 자리에 누웠는데, 배고픔이나 종아리 아픔보다는 부끄러움에 잠을 들 수 없었던 어린 날의 그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 번째로 아버지께 맞은 기억은 5학년 때이다. 당시에 우리의 놀이는 구슬치기나 딱지치기였다. 가끔은 동네의 중학생 형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하루는 판이 커지면서 유리구슬치기가 동전치기로 변해버렸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장시간 혈투를 벌인 결과 제법 많은 돈을 따가지고 개선장군처럼 집에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서 동생에게 돈 자랑을 하다가 그만 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도 여지없이 내 종아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리고 아버지는 돈을 모두 돌려주고 오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그날은 돈을 돌려주는 것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을 숨겨놓고, 다 돌려주고 들어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부모님을 속였다는 죄책감과 무서움에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세 번째이자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맞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사소한 일로 같은 반 친구와 주먹다짐을 벌이고, 밤늦게 집에 살그머니 들어가려는데 아버지가 골목어귀에서 지키고 서 계셨다. “네가 깡패냐?”하는 고함과 함께 뺨에서 불이 번쩍 나도록 아버지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맞는 이유를 몰라 어안이 벙벙했는데 알고 보니 맞은 친구의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난리를 치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집에서 쫓겨나 친구네 꽃가게에서 먹고 자며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 되던 날 하굣길에 어머니가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마지못한 척하며 어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는 한번 돌아보시고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이때를 끝으로 더 이상 아버지에게 혼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착한 아들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때부터 나를 다 큰 아들로 인정해주시는 것 같았다.

세월이 한참 지나 아버지가 교직을 은퇴하시고 차츰 기력이 쇠해지면서 아버지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할수록 대화가 늘어나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부자의 정도 깊어졌다. 그리고 내 나이 오십이 되고 아버지가 병석에 누우셨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꾸지람과 회초리의 의미도 깨닫게 된 것 같다. 성장의 고비마다 그런 아버지의 회초리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를 먹어가는 지금도 아버지의 회초리가 절실한데, 그분이 안 계시니 더욱 아버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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