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
불법체류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8.10.24 19: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인다. 드디어 이륙의 몸부림을 끝내고 날아오른다. 기체의 흔들림도 잔잔해지고 소음도 차차 가라앉는다. 창밖에 목화송이로 가득 피어난 구름이 포근함으로 유혹을 하고 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누우면 스르르 잠이 들것만 같다. 짓궂은 구름이 밀려나고 밖이 깜깜해져서야 다섯 시간의 고된 비행을 마친 비행기는 낯선 곳에 날개를 내려놓았다. 태국의 수완나품공항이다.

여행사를 통해 온 여행은 공항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가이드다. 대개 현지가이드가 처음부터 돌아가는 날까지 한 사람이 맡는다. 우리를 기다리는 이는 웬일인지 태국인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 몸짓으로 알아듣고 그녀를 따라갔다. 1층에서 한국인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가 두 명이다. 가이드는 버스에도 필히 원어민가이드를 쓰게 되어 있다고 한다. 여행 중에 만나게 될 태국가이드만 네 명이라고 소개했다. 공항에서의 안내자와 버스에 함께하는 사람, 그리고 왕궁을 소개하는 이, 또 산호섬을 인도해줄 사람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팁문화가 불문율처럼 자리 잡고 있다. 호텔에서의 짐을 객실까지 가져다주는 벨보이와 객실청소를 해주는 하우스키퍼에게 1달러를 주는 게 기본이라고 한다. 원화로 천원을 주면 된다고 했다. 의무는 아니라 해도 의무처럼 되어 있는 팁이었다. 그들의 요구가 당당하다.

관광으로 살아가는 나라라지만 자국민을 위한 정책에 놀랐다. 일자리를 위하여 만든 방침으로 보인다. 여러 명의 가이드비를 부담하기에 여행비용이 많이 늘어나는 셈이다. 그리 안 하면 여행객을 받지 않겠다는 고집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배짱을 부릴만해 보이진 않는데 의아해졌다. 어쩌면 여유로움으로부터 오는지도 모르겠다.

소승불교를 종교로 삼는 이들은 윤회설을 믿는다. 이생의 삶을 지나가는 찰나라고 여긴다. 좋은 일을 많이 하여 공덕을 쌓아야 만이 내세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며 보이는 거리의 사람들의 발걸음도 느릿느릿하다. 우리의 서두르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달리는 차에 오토바이가 대들고 끼어들어도 누구 하나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는다.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에서도 기다리고 기다려주고 서로서로 잘 간다. 툭하면 울려대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신기할 뿐이다. 틈만 나면 나는 생소한 풍경에 넋을 놓았다.

둘째 날, 호텔에서 나오면서 엄청난 실수를 했다. 시간에 쫓겨 급히 나오는 바람에 팁을 두고 오는 걸 잊고 왔다. 모두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무언의 질책들이 와 박혔다. 법을 어기지도 않고 잘못한 것도 아니건만 죄 아닌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다음 행선지를 가면서도 마음이 자꾸만 발짐을 늘려놓았다.

3박5일의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지만 내 미안한 마음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에게 나로 인하여 한국의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자책이 거기에 머물게 한다. 여권도 없이 불법체류 중이다. 나의 자존감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나는 강제로 소환하지 않을 생각이다.

열대지방의 습지에 사는 맹그로브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열매를 매달은 채 씨에서 싹을 틔운다. 어느 정도의 크기로 자란 작은 나무가 물에 떨어진다.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좋은 환경을 만나면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물속에서 크는 나무는 잠깐 사이에 숲이 된다.

태국에서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집이 이루어낸 맹그로브나무 같은 숲을 보았다. 장관을 이루고 있는 자존감의 숲이었다. 혹시 아는가. 오래 있다 보면 떠돌던 그네들의 자존감주아가 울기 직전의 축축해진 내 심안의 습지에 뿌리를 내릴지. 초초 우거져 숲이 될지 누가 아는가. 그리하여 나도 고집을 세워 그들처럼 도도해지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