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이름 이래야 하나
아파트 이름 이래야 하나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8.10.2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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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아파트를 탓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국적불명의 아파트 이름에 대한 고해성사입니다. 아파트는 우리 선조들이 경험하지 못한 주택 양식입니다. 5층 이상의 건물에 층마다 여러 집으로 구획하여 각각의 독립된 가구가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든 공동주택을 이릅니다.

땅은 좁고 인구밀도는 높은 우리나라 여건에 적합한 주택양식이거니와 편의성과 집적의 효과가 높아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소도시까지 아파트 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아파트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하여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나 인터넷처럼 아파트도 우리말 보통명사로 편입된 지 오래입니다.

문제는 아파트 이름입니다. 현대, 삼성, 대우, 청구, 부영 같은 시공사 이름이 붙은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더니 언제부터인가 시공사 이름 뒤에 국적불명의 외래어 이름이 붙은 아파트단지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절찬리에 팔려나갔습니다.

시공사는 아파트의 브랜드가치 창출과 분양의 효율성을 위해 외래어를 쓰고, 소비자들은 세련되고 되팔 때 유리하다는 생각으로 외래어 이름을 쓰는 아파트를 선호하니 그럴 수밖에요.

대한민국의 중심을 자처하는 청주시의 아파트들의 이름을 한번 볼까요. 지웰시티, 비발디, 칸타빌, 롯데캐슬, 코아루, 힐데스하임, 위브, 리슈빌, 쟈이, 하이츠, 첼시빌, 우미린, 베르힐, 시티즌 등 외래어 일색입니다. 소수의 오래된 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아파트들이 이처럼 국적불명의 외래어를 쓰며 보란 듯이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주하는 입주민들 태반은 자신이 사는 아파트 이름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아파트값 오르기를 고대하며 외딴섬처럼 살고 있습니다. 지방도시가 이럴 진데 서울특별시와 광역시 같은 대도시들은 더할 나위 없겠지요.

아파트 이름만 보면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유럽인지 미국인지 혼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여 부끄럽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기도 합니다. 이런 실정임에도 정부와 지자체들이 나 몰라라 하니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통탄할 일입니다.

의식주(衣食住)는 다시 말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집에 사느냐는 민족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DNA와 같은 것입니다. 주(住)에 해당하는 아파트는 가족들이 먹고, 자고, 공부하고, 쉬고, 후대를 생산하는 독립공간이자 행복공간입니다.

그런 중요 공간의 이름이 주체성 결여와 자본주의의 탐욕으로 인해 해괴한 외래어 이름들이 난무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자 함입니다. 행복아파트, 보람아파트, 사랑아파트, 둥지아파트, 장수아파트, 늘푸른아파트, 미소지움아파트와 같이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도 시공사들이 경쟁하듯 외래어를 쓰는 건 외래어사대를 넘어 민족혼의 말살입니다.

소규모 다세대주택은 몰라도 500가구 이상이 사는 아파트 이름만은 외래어 이름을 자제할 것을 호소하고 촉구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이를 법제화하거나 지자체들이 건축허가 시에 한글이름을 권장하면 금상첨화지만 그럴 개연성이 희박하니 언론과 시민단체가 나서서 외래어추방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그러면 아파트를 건축하고 분양하는 회사들이 아파트 이름을 공모해 작명하는 등 신중을 기할 터이고, 소비자들도 외래어 이름을 쓰는 아파트를 비토하거나 불매하는 기풍이 진작되겠지요. 이런 꿈을 꿉니다. 입주민회의를 통해 우리말로 개명하는 아파트들이 속출하기를. 그리고 `우리말 아파트 이름만 쓰는 문화도시 00시로 오세요'라는 광고와 그런 도시의 출현을. 그 아파트에서 섹스피어와 베토벤과 피카소 같은 위대한 예술가와 링컨 같은 훌륭한 정치인이 나오기를. 그대도 내 꿈에 동조해주기를. 아니 그대도 그리하기를.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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