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가을 편지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8.10.2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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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어느새 캄캄해진 새벽. 일상이 된 무심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사방이 무겁고 어슴푸레한 길. 유난히 눈부신 라이트를 켠 자전거 한 대가 마주오고 있습니다. 눈을 찌르는 듯 불빛이 나를 위태롭게 하는 순간, 가까이 다가온 자전거는 내 앞에 이르러 가만히 불빛을 가리며 지나갑니다.

자전거를 탄 그 사람, 참 아름답습니다. 그 작은 손짓으로 인해 스스로의 전망은 어두웠을 테지요. 그러나 강렬한 불빛에 가로막혀 그 뒤편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내 앞길은 짙은 안개에도,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의 어둠에도, 더 환하게 밝아오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가을엔, 아니 그 쓸쓸한 계절이 지나 삭풍이 몰아칠 겨울이거나 다시 파릇한 봄과 여름에 이르는 온 계절을 그렇게 살겠습니다. 비록 잠시 서성이고 있는 내 갈 길은 어두운 순간순간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희미하게나마 세상의 빛을 열어주는, 그 사람이 나아갈 길을 방해하지 않고 더 넓고 아름답게 열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참 오랜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앞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불빛은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에게는 그 불빛이 날카로운 눈부심이 되어 시야를 가리게 되고 어쩌면 순식간에 그 사람을 곤경에 빠트릴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의 나는 늘 최고를 꿈꾸며 최고의 나날들과 최고의 사람을 찾거나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청하여 왔습니다. 최고를 꿈꾼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스스로가 늘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 나는 게으른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겨왔고, 스스로에게는 얼마나 냉정하게 옥조이며 살아왔는지 조금씩 비워지는 들판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조금은 마음을 비우고 사람으로, 사람같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인사 또한 “오늘도 사람으로 사람들과 같이 사는 날 되소서.”로 바꿀까 합니다.

정북토성 너른 들을 가득 채웠던 곡식들이 수고로운 사람들의 피와 땀을 낱알 하나하나에 송알송알 담은 채 땅을 비우고 있습니다.

성벽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 다섯 그루는 여전히 푸른 잎으로 남아 있는데, 가만히 보면 가을이 깊어 갈수록 온 천지의 생명들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푸른 잎이 갈색으로, 또는 노랗거나 붉거나, 주홍의 빛깔로 바뀌고, 물기를 잃어버린 잎사귀들은 깃들어 있던 나뭇가지에서 별리의 숙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안개는 햇살을 끝끝내 견뎌내지 못합니다. 이리저리 흩어졌다 모아지기를 반복하다가, 찬란한 가을 햇살을 받아 영롱한 빛으로 산란하다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지난 주말 상봉재 고갯마루의 단풍은 참 고왔습니다. 산등성이를 온통 붉고 노랗게 수놓은 단풍은 아직 산 아래 발치까지는 다가오지 않고 있습니다. 단풍은 80%쯤 산을 채웠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채워지기를 바랄 때, 단풍은 산 정상부터 서서히 민머리를 드러내며 `비우라 비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형형색색 단풍에 취해 상기된 표정입니다. 신록의 푸른 몸으로 할 일을 다 한 잎들이 비로소 지상으로 내려와 고단한 육신을 눕히는데, 가을바람은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함부로 쓸고 다닙니다.

세상사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공연히 조바심을 내고 저마다 최고가 되려는 치열함을 내려놓지 못할 때, 만물은 차분하게 다음이거나 새로 태어날 것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사라짐을 어색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쓸데없이 분주했던 심장을 비우며 이 가을, 노래를 듣습니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양희은. 한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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