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오는 병
가을에 오는 병
  •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10.1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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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가을이 깊어 가는가 보다. 스쳐 지나가는 일상이 나무젓가락만큼 가벼워지는가 싶더니 생각이 많아졌다. 숨겨 놓은 사랑이야기가 없다 하더라도 떨어지는 낙엽 위에 겹쳐지는 시詩 구절이 생각나고, 과일가게 좌판의 빨간 석류가 가을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한적한 시골 들길을 한없이 걷고 싶은가 하면 저녁상에 올라온 매콤한 콩나물국 한 그릇에 울컥하기도 한다. 일조량이 줄어들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일어나는 우리 몸의 생리적 호르몬 변화 때문이란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가을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주위를 둘러보게 하고 따스한 인정을 그리워하게 한다. 증세가 심해지면 이른바 `가을 탄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가을 타는 병을 앓고 있나 보다.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에 빠져 지낼 정도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작은 일에도 가슴이 울렁인다. 가끔 옛 인연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불쑥 솟아 올라온다. 기억 저편에 웅크리고 있다가 가을볕 맑은 날 가만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대개 어릴 적 인연들이다.

중학교 2학년 미술 시간이었다. 산골마을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예쁘고 세련된 여자선생님이 수업도중 옆을 지나가면서 슬그머니 내 손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서울에서 미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부임한 선생님은 짓궂은 장난으로 비틀린 애정표현을 하는 사춘기 학생들 때문에 약간 냉랭한 편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내 손을 몰래 잡아 주었던 것이었다. 일 초가 될까 말까 한 짧은 시간. 그 순간에 전해진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은 잠자고 있는 나의 감성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던, 그저 평범한 존재에 불과했던 내가 갑자기 사랑이란 감정으로 한껏 부풀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만큼 기쁘고 살맛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나 스스로 올바르고 멋지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에 불을 댕겼다. 그때 선생님은 어떠한 생각으로 그러한 신호를 보냈는지 모른다. 그냥 `귀엽다'는 가벼운 의미였을 것이다. 또는 열심히 하라는 사소한 격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넌 참 멋진 남자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고, 며칠이 지나면서 `너의 연인이 될 수도 있어'라는 의미로 발전하기도 했다.

사랑이란 따지고 보면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뇌에서 지어내는 아름다운 착각의 과정이 사랑의 실체다. 그러나 그러한 착각의 환상이 가져오는 에너지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 지금은 70대 중반의 노인이 되었을 그분을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다시 만나 뵙고 싶다. 지금껏 내 가슴 속에 고이 잠자고 있던, 아직도 퇴색되지 않은 분홍색 짝사랑을 꺼내 보여드리고 싶다. 그리고 이번엔 나의 따뜻한 손으로 그분의 주름진 손을 잡아드리고 싶다.

“가을을 타지 말고 걷자”

어느 일간지의 문화면을 장식한 머리말이다. 아마 나 외에도 가을을 타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글쓴이는 산길이나 둘레길을 열심히 걷다 보면 우울해지거나 무력해지는 증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어서 가을 병을 치료하자는 말이다. 그럴 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 병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가을에 취해 일상에서 갈지(之)자걸음을 걸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을을 타야 진정한 가을이 내게 올 것 같다. 감기를 앓고 나서 건강을 생각하게 되듯이 가을을 앓고 나야 내 속의 깨어 있는 감성으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깨에 작은 흉터를 남기는 천연두 예방주사처럼 삶의 고독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가 생길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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