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문을 추억하며
신동문을 추억하며
  •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18.10.1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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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지난 일요일 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오창 미래지공원에 갔다. 청주의 시인 신동문을 기리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조경작가와 시민들이 만들어 놓은 초록 정원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잘 정돈된 정원 사이로 수줍게 나있는 숲길을 걸으니 능선 너머의 풍경은 시가 되고, 시는 또다시 길 위의 풍경이 된다.

한참을 걷다 보니 `동문(東門), 하얀 이상의 검은 정원'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신동문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정원이었다. 동쪽 벽을 향해 매달려 있는 하얀 쪽문, 그리고 검은색 정원. 척박한 이 땅에 문학의 씨를 뿌리신 분을 기리는 정원이라기에 소박하다. 작가는 하얀 쪽문을 통해 동문이 꿈꿨던 이상을, 그리고 검은색 정원은 암흑 같았던 시대적 현실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동문, 원래의 이름은 건호. 동문이란 이름은 그가 폐결핵으로 충북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니 죽은 사람들은 모두 동쪽 문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필명을 동문으로 지었다고 한다. 시구문(屍口門)을 필명으로 삼은 그의 이름이 그 어떤 시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는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시인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사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온 그는 정치권력의 독재와 부조리 그리고 전쟁과 기계문명의 비정함에 펜을 들어 용기 있게 맞섰다.

4·19혁명을 노래한 많은 시들 중에서 나는 동문의 `아! 신화 같이 다비데군(群)들'을 좋아한다. 30대 중반까지 청주에서 신문과 언론에 글을 써오던 그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학생데모의 배후로 지목되어 도망치듯 서울로 상경했다. 그때 서울은 수많은 시위대가 종로와 광화문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대통령 집무실이었던 경무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경찰의 총칼 앞에 쓰러지고 피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토해내는 그들의 절규를 그는 현장에서 똑똑히 보고 듣고 시로 썼다.

그 후 동문은 김수영, 신동엽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저항시인으로 불렸다. 그가 이토록 사회에 저항하는 글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 시가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 말이라도 마음껏 하고, 글이라도 소신껏 쓰고 싶었던 젊은 시인의 소리 없는 절규였을까.

그랬던 그가 1975년, `창작과 비평(대표 신동문)'에 발표된 이영희 교수의 배트남 파병에 관한 글이 문제가 되어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절필 이후 그는 서울의 지식인들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버린 채 단양 오지마을로 낙향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농사꾼으로, 침술가로 그렇게 살았다.

시인이면서도 시를 쓸 수 없었던 동문의 삶은 아름다운 모순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더욱 시적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나마 지역의 문학인들이 해마다 문학제를 개최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이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정원의 동쪽에 난 하얀 쪽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동문은 그 문을 열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고, 시의 순수함을 끝까지 쫓지도 못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문은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고독했지만 시처럼 살다간 동문,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의 슬픈 미련과 서글픈 마음은 어디에 두고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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