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벽루
부벽루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10.1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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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평양에는 대동강이 있다. 이 대동강을 굽어보며 우뚝 솟은 누각이 있으니, 부벽루(浮碧樓)가 그것이다. 대동강의 바위 절벽 청류벽 위에 얹혀 있는 이 누각은 예부터 평양을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이었으며, 꼭 시를 남겨 놓곤 했던 곳이다. 이 부벽루 안에 남겨진 많은 시가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고려(高麗)의 시인 이색(李穡)이 쓴 시일 것인데, 시의 제목 또한 부벽루(浮碧樓)이다.


부벽루(浮碧樓)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성공월일편)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
石老雲千秋 (석로운천추)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 년의 구름 흐르네.
麟馬去不返 (인마거불반)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장소의풍등) 돌다리에 기대어 휘파람 부노라니
山靑江自流 (산청강자류)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영명사는 고구려 때 창건된 절로 금수산 부벽루의 서쪽 기린굴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부벽루는 영명사에 부속된 정자로 본디는 영명루(永明樓)라 불렸었는데, 고려 중엽에 정자의 풍경이 마치 대동강의 푸른 물결 위에 떠 있는 듯하다고 하여 부벽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시인은 이 시를 쓰기 바로 전날 영명사를 지날 일이 있었는데, 명색이 글을 쓰는 사람인지라 문인들에게 특히 잘 알려진 부벽루를 오르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부벽루에 올라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내려다보고는 깊은 감회에 젖었다. 그 감회는 다른 문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영고성쇠(榮枯盛衰), 인생무상(人生無常) 같은 것이었지만,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선명하다.

옛날의 번화함은 간데없이,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성과 그곳을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비추고 있는 한 조각 달은 인간의 한계성과 자연의 무궁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기린마를 타고 상제(上帝)의 조정에 올라가 상제로부터 정치의 도를 배울 때, 출발 지점이 바로 조천석(朝天石)인데, 시의 바위(石)는 바로 이 조천석을 일컫는다. 이 전설의 바위는 동명왕을 까마득히 잊은 채 오랜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고, 그 위로는 동명왕 당시의 구름이 여전히 떠 있다. 이 또한 인간사의 부질없음과 자연의 영원함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기린마도 그것을 탄 왕손 곧 동명왕도 다 사라져 버린 데 생각이 이르자 시인은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의 한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른다. 영원한 대자연 앞에서 제아무리 영웅적인 인간사라 할지라도 그저 부질없는 것임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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