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시를 품다
가을밤 시를 품다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8.10.1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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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안희자 수필가

 

서늘한 바람 한 줌에서 가을이 묻어온다. 심해 같은 하늘, 드넓은 황금 들녘, 매미 소리 고요한 공원의 가로등 불빛까지 한 편의 시가 된다. 만물이 풍성한 이 가을엔 잘 여문 곡식처럼 감성 충만한 시를 품고 싶다.

저녁 무렵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문학 모임의 행사로 문학인 초청 강연회가 있다. 제목은 감동이 없는 한국 현대시. 이승하 시인이 청주 문인들을 위해 귀한 걸음을 하셨다. 삼십 여년 넘게 시를 쓰셨고, 많은 시집을 출간하셨다. 뿐만 아니라 산문집, 문학평론집을 내신 이력에 감탄하였다. 무엇보다 설레는 건 시인의 작품과 강연내용이었다. 시인은 젊은 날 뼈를 깎는 아픔으로 고뇌하며 시를 쓰셨단다. 좋은 시를 골라 필사했고 여러 문예지에 투고하셨다고 했다. 또한 소년원 중, 고등학교에서 시 창작 법을 지도해 준 적이 있고, 여러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시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시인의 따스한 인품이 인상적이었다. 첫 무대로 시인의 작품이 낭송 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만지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젖가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매끈함, 그 부드러움, 그 향기

봉긋 솟아오른 목련 봉오리 같던……

수위 갖춰 입고 잠든 모습

화장터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니

한쪽 가슴마저 없어졌다

남은 것은 두 눈 뻥 뚫린 해골바가지 한 개와

대칭을 이룬 팔다리뼈, 갈비뼈와 골반 뼈

눈이 부신 저 백목련 꽃잎들

피부 빛깔보다 하얀 뼈, 뼈의 꽃송이, 뼈의 눈송이들

분쇄기로 빻아서 건네주는 항아리 하나에 담긴 생애

어머니 젖가슴을 만질 수 없는 이 딱딱한 세상.'



-이승하 시인의「저 목련 봉오리」중 (일부 생략).



시인의 작품 속에 빠져드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절절한 시가 생생한 울림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릴 적 묻어두었던 기억 하나, 따스한 엄마 품이 생각났다. 그날 볼거리를 심하게 앓아 온몸에 열이 펄펄 끓어올랐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엄마는 옷섶을 풀고 가슴을 내어주셨다. 아늑한 엄마 품에 안겨 스르르 잠들었던 그날이 기억 속에 맴돈다. 내가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독차지했던 마르지 않는 샘물, 사랑의 젖가슴이 아니던가. 그러나 엄마가 떠나신 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말랑말랑한 엄마의 젖가슴. 그 훈훈한 온기, 보드라운 그 느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감동의 언어는 시라고 생각한다.

이승하 시인은 난해한 시보다 `감동'이라는 키워드로 현대시를 조망한다. 시는 기교보다 의미 전달이 중요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움이다. 언젠가 시인의 어머니는 암 수술 후 한쪽 가슴을 잃었고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시인은 더 이상 어머니의 아름다운 목련 꽃봉오리를 볼 수가 없다. 마음을 흔드는 시는 아픔도 삼켜버리게 한다. 시의 매력이다. 그래서 슬픈 시를 음미하면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고 덧나지 않는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넘친다 해도 엄마 젖가슴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감동은 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필을 쓰고 있지만 밋밋한 내 글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지 뒤돌아보았다. 문학은 감동의 언어로 독자의 마음을 보듬어준다. 문화 공간에서 시인과 관객이 소통하며 가을밤 시를 품은 시간은 더없이 풍요로웠다. 마음 밭에 거름을 준 듯 흡족하다. 엄마 품이 그리운 오늘, 밤하늘을 쳐다보며 < 저 목련 봉오리> 시를 읊조려 본다. 밤하늘을 수놓은 찬란한 별빛도 한 편의 시가 되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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