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참 곱다
단풍 참 곱다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8.10.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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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10월 초의 미동산수목원에 가을이 이제 막 도착했다. 몇 나무만이 가지 끝에 꽃 같은 단풍을 몇 개 달았을 뿐, 울창한 숲은 아직도 초록이다. 여름내 영 물러서지 않을 듯 기세등등하던 태양은 어느새 창백해져 이제는 작은 바람에도 밀린다.

가을 들꽃의 여린 자태가 곱다. 벌과 나비들은 하루가 다르게 식어가는 열기에 절박한 듯 바쁘다. 이 꽃 저 꽃 옮겨가며 꿀을 따느라 다가가도 모르고 제 일만 한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사마귀들이 위험하게도 사람 다니는 자갈길에까지 나와 일광욕을 하고, 풀이 무성한 곳을 걸을 때면 걸음마다 방아깨비와 메뚜기들이 토도독토도독 발치에 앞서 날아간다.

하늘에도, 저 먼 산에도, 사그락대는 발걸음에도, 친구들의 얼굴에도,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 속에도 성큼성큼 가을이 다가온다. 산자락을 크게 휘감아 돌아 나와 정자에 앉으니 은근히 차다. 따끈한 차 한 잔 마시고 싶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 사거리에서 멈춰 신호를 기다리는데, 마침 저 건너편에 카페가 보인다. 전통차, 사주카페. 색깔과 글씨체가 예사롭지 않은 간판이었다. 카페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사람이 있을까?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친구들과 함께하니 호기심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여차하면 따끈한 전통차 한 잔씩만 하고 나오기로 했다.

카페 안은 생각보다 좁고 그림과 글이 벽과 천정에 가득했다. 상상도 못 한 모습이었다. 하긴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 것인가? 막상 자리에 앉으니 창백하게 생긴 주인장이 차분하게 몇 가지 설명해주는데 점이 아니라 학문이라고 하는 소신에 끌려 결국 사주를 보기로 했다. 사주를 주문하면 차는 공짜다.

생년월시를 주고 10여 분을 기다렸다가 내가 먼저 상담을 하였다. 그 작은 가게 안에서도 주인이 사주를 가장 편하게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따로 있었다. 처음엔 내 삶에 대해 누구에게 물어볼 것이 없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질문이 많아졌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내 삶은 아주 짧은 시간에 단순한 줄기로 정리되었다. 나의 생년월시로 정해진 운명에 따라 진행된 듯 나의 지나온 시간은 왜 이리 딱 들어맞는가? 묘한 감정이 되었다.

여러 날 동안 평소보다 격렬한 감정의 연쇄 반응이 계속됐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떤 길을 지나왔는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어딘지도 모르는 현재에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철로 가닥 같은 긴 선 같은 삶이다. 다시 앞을 보아도 마찬가지로 가지런한 길이 놓여 있었고 그 끝은 보이지는 않지만 뻔한 듯이 보였다. 인생 참 간단하고 허무하구나. 나의 자유 의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여러 날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나를 깨운 건 일상이었다. 사흘의 연휴를 지내고 바쁜 생활의 현장으로 돌아와 보니 매일매일 뜨겁고 치열했던 지난여름의 순간순간의 삶이 느껴진 것이다.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가을 참 곱다. 단풍은 초록이 부서진 후 초록에 가려졌던 색이 나타나는 것이라는데,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선선한 가을이 되면 가지게 되는 자기만의 색이다. 사람도 이렇게 인생의 가을이 되면 자기만의 단풍 빛으로 물들게 되는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가장 자기다운, 가장 다채로운 색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지금은 모든 생명체가 초록이 부서지는 아픔을 겪는 시간, 가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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