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불이 빚어낸 첨단소재 기와생산 단양 하현천유적
흙과 불이 빚어낸 첨단소재 기와생산 단양 하현천유적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10.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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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2008년 4월 15일.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단성면소재지에서 하현천을 잇는 도로로 잘린 단면의 적갈색 점토층(고토양층)에서 뗀석기 2점과 도로 위에 뒹굴던 깨진 기왓조각을 수습하였다. 이 보잘 것 없던 유물 몇 점이 3만 년 전 현생 인류의 문화와 고려~조선시대 충북지역 최대 규모의 기와생산 산업단지를 밝혀주는 실마리가 되었다. 단양 현천리 하현천 유적으로 2011년 한국선사문화연구원에서 발굴하였다.

이 유적은 일제강점기에 도로 개설과 옛 중앙선 철도(1942년 개통)가 만나는 지점으로 토목공사로 지형이 깎이고 잘렸으나 역사흔적마저 지우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땅속에서 오랜 세월 잘 버텨와 우리 앞에 그 실체를 잘 드러내었다. 적성(사적 265호)과 신라적성비(국보198호)가 있는 성재(323.7m)의 북쪽사면 끝자락, 남한강과 단양천, 죽령천의 세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지점에 하현천 유적이 자리한다. 능선 3면이 강줄기로 둘러싸인 지리적 입지와 완만하게 남한강을 향하여 길게 뻗어내린 지세, 바람길, 땔감, 운송 등 당시 건축재로서 첨단소재인 기와를 대량생산하기에 양호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구석기 유물층은 도로 및 철도공사와 기와제작을 위한 채토과정에서 대부분 훼손되어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서 찍개, 주먹대패, 긁개, 여러면석기, 망치돌 등을 찾았고, 연대측정 결과 30,680B.P.의 연대값을 얻었다. 연대값, 돌감선택 및 석기제작수법 등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 이른 시기에 현생인류가 이곳에 먼저 터를 잡고 일정기간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과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곳에는 후기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의 수양개유적 1지구가 있다.

기왓가마는 능선 하단부에 고려시대 기왓가마 8기, 상단부에 조선시대 기왓가마 9기 등 17기의 기왓가마가 중복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축조되어 있다. 또한, 조사범위 밖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근래까지 기와생산활동이 지속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하현천 유적은 흙과 불이 빚어낸 첨단 건축재인 기와를 대량생산하던 첨단산업단지로서 역할을 하였던 듯하다.

고려시대 기왓가마는 모두 반지하식으로 연소실의 평면형태는 역삼각형을 이루며, 불턱의 높이는 50cm 미만으로 낮고 경사도는 60도이다. 아궁이는 양측 벽에 장대형 할석을 세운 후 이맛돌을 올린 문틀식 구조이다. 소성실의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이고 폭 140cm, 바닥 경사도 10도 내외의 평요로 무단식 구조이다.

조선시대 기왓가마는 지하식과 반지하식이 고루 분포하며, 연소실의 평면형태는 종형에 가깝다. 불턱의 높이는 60~110cm로 고려시대 가마보다 높고, 경사도는 70도로 수직에 가깝다. 아궁이는 할석을 채워넣어 조성하였다. 소성실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이고, 폭은 200~245cm로 고려 기왓가마보다 넓으며 경사도는 20~30도의 등요이다. 기왓가마 연소실의 평균면적은 고려시대 기왓가마가 2.1㎡, 조선시대 기왓가마가 4.7㎡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소실이 커지면서 화력이 증가하고 이를 통해 대량생산 및 양질의 기와를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를 구울 때 땔감으로 사용된 나무는 분석결과 추정 지름은 25~56cm로 20~30년 이상 된 소나무를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가마에서는 중사오월일조명(仲巳五月日造銘)명 명문기와편이 다수 출토되었다. 목민심서에 “기왓가마 설치시기를 춘분 이후에 설치하여야 하며, 하지 이후에는 설치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춘분 이후 하지 이전이 기왓가마제작에 적당한 시기로 보인다. 명문기록의 5월에 제작하였다는 것과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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