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운다
한국어가 운다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18.10.1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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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한글날이 또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아니 올해도 천덕꾸러기가 된 한국어가 신음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이처럼 한국어가 정체불명의 외래어와 품격 없는 신조어에 잠식당해 존재감을 잃고 있는데도 이 나라 이 정부가 멍하니 손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하기 좋은 결실의 계절 10월 하루를 보람없이 공치는 `이러려고 한글날을 제정해 국경일로 했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하여 한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아니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세종특별자치시가 나름 의미있는 행사를 펼쳤을 뿐 정부도 의례적인 기념일 행사에 그쳤고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나 몰라라 했으니 말입니다.

한국어. 우리말이라 해도 좋고, 나랏말씀이라 해도 좋고, 모국어라 해도 좋습니다. 그 한국어가 시름을 앓고 있습니다. 토종개구리가 수입종인 황소개구리에 씨를 말리듯, 토종민물고기가 베스와 블루길 같은 외래어종에 잡혀먹혀 씨를 말리듯 우리말 한국어가 외래어에 밀려 존망의 기로에 있어서입니다. 기가 찹니다.

아시다시피 한글날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해서 세상에 펴낸 것을 기념하고, 우리 글자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뜻 깊은 국경일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연구회가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북돋우기 위하여 1926년에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지정해 기념해오다가 1928년 `한글날'로 개칭했고, 광복 후 양력 10월 9일로 변경한 후 2006년부터 국경일로 지정되어 경축하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25년인 1443년에 완성하여 3년 동안의 시험 기간을 거친 다음 세종 28년인 1446년에 세상에 반포되었죠. 따라서 한글은 남의 글을 차용한 게 아니라 세종대왕이 주도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문자로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치자를 위한 문자가 아니라 피치자를 위한 사랑의 문자입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세계 문자 역사상 그 짝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우수한 문자입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시대에 효용성이 가장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고 있어 한글의 미래는 매우 밝습니다.

문제는 모국어인 우리말 한국어의 사양화입니다. 유수의 미래학자들이 한글은 문자의 우수성으로 인해 살아남는데 한국어는 도태될 거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듯이 믿기지 않지만, 자존심이 상하지만 결코 가볍게 들을 사안이 아닙니다.

요즘 한국인이 쓰는 생활언어 중 30% 이상이 외래어이니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기업은 말할 것 없고 모국어를 지키고 다듬어야 할 정부와 지자체 공무원들조차 그들이 생산하는 각종 문서에 경쟁하듯 외래어를 남발하고 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여인숙과 여관이 모텔과 호텔로 물갈이 된 지 오래이듯, 미장원과 이발소가 헤어숍으로 바뀌었듯이 대화나 문장 속에 외래어를 써야 고상하고 세련되어 보인다는 외래어 사대가 민족혼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도 아파트 이름은 물론 공무원들조차 비전, 프로젝트, 브리핑, 케어, 미팅 같은 말을 쓰는 것도 부족해 기관 명칭이나 축제명칭까지 센터니, 플라자니, 엑스포니, 마스터십 같은 외래어를 마구 쓰고 있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말은 민족의 얼이자 혼입니다. 일제가 식민통치 때 창씨개명을 종용하고 우리말을 못 쓰게 한 것도 민족정기와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을 타지 않고 냇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가니'라고 순수한 우리말과 우리글로 이르셨습니다.

그 유지를 받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샘이 깊은 물이 되어 위기에 처한 우리말의 건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계를 흔들고 있는 K팝처럼 우리말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더는 우리말이 슬퍼 울지 않도록.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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