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가 왜 필요한가
보훈처가 왜 필요한가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8.10.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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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지난 광복절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 4명에게 부여했던 정부포상을 취소했다. 이들 중 3명은 지난 1968년 유관순 열사와 동급인 `독립장'을 받았다. 인정된 공적이 유관순 열사에 견줄 정도로 대단했다는 얘기다. 50년 만에 포상이 취소된 것은 보훈처 심사 당시 제출된 공적이 허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짜 공적으로 보훈처를 속이고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사람과 후손들이 무려 반세기 동안 국가적 명예와 혜택을 누려왔다니 기가막힐 일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을 포함해 총 5명에 대한 독립유공자 조작을 모두 한집안에서 벌였다는 점이다.

황당한 사기극의 전모는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순국한 김진성 선생의 아들에 의해 밝혀졌다. 한국으로 귀화한 그는 우연히 국립묘지에서 부친을 사칭한 묘를 발견하고 경위를 추적한 끝에 진실을 밝혀냈다. 부친의 공적을 도둑질한 집안이 또 다른 4명의 조상을 독립유공자로 조작해 서훈을 받은 사실도 밝혀냈다. 문제의 가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그동안 연금을 꼬박꼬박 챙기고 혜택도 누려왔다.

보훈처의 공적 심사가 어땠기에 독립지사의 숭고한 애국혼을 가로챈 사기꾼 가족이 3대에 걸쳐 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명문으로 행세해왔는지 황당할 따름이다. 이 가족은 한 독립지사의 활약이 보도된 신문기사를 가져와 기사의 주인공이 삼촌이라며 후손이라고 우겼다. 보훈처는 기사의 인물과 삼촌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다른 데도 “독립운동을 가명으로 했다”는 억지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가짜 독립유공자 4명의 서훈이 취소되던 날 옥천군 청산면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고 박동희 선생이 대통령 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박 선생은 스물세 살이던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한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당하고 60대 태형을 받고 출소했으나 후유증으로 한 달만인 그해 5월 순국했다. 보훈처는 그가 순국한 지 근 100년이 지나서야 독립유공자 지위를 부여했다. 후손들이 만세운동에 함께 참여한 생존자들의 증언과 사망 자료를 토대로 보훈처에 심의를 요청했지만 입증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기각됐다. 사망신고를 늦게 했다거나, 형량을 태형 90대 이상으로 정한 유공자 요건에 미달한다는 등의 사유도 달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 2013년 청산면사무소 창고에서 일제시대 수형자 명단이 적힌 문서가 발견되고서야 사정이 달라졌다. 문서에는 청산 독립운동 주역인 박 선생의 신상과 형량, 판결날짜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후손들이 이 자료를 근거로 재심을 요청한 끝에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았으나, 그 과정도 5년이나 걸렸다. 보훈처가 가짜 독립유공자를 서훈한 과정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한쪽은 당사자 이름도 일치하지 않는 신문기사만으로 유관순 열사급의 서훈을 주고, 한쪽은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증언조차도 부정하며 등을 돌렸다.

공적 심사만이 문제가 아니다. 관련단체에서는 공적을 조작하거나 부풀려 서훈을 받은 사이비 독립유공자가 족히 100명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독립유공자 전수조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지만 보훈처는 미온적이라고 한다. 가짜 독립운동가 의혹이 터진 지 20년이 지나서야 서훈이 취소된 데 대한 해명도 없다. 김진성 선생의 아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처음에는 동명이인이라며 뭉개려 했다는 의심도 받는다.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가로챈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 어떤 법적 조치를 취했는지도 아직 듣지 못했다.

우리는 친일 청산에 철저하게 실패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훈처는 치욕의 과거를 씻어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오로지해야 할 기관이다. 그러나 가짜가 판을 치게 하고 진짜 유공자는 문전박대하는 얼치기 행정에서는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는다. 옥천 청산면에는 박동희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다가 호된 옥고를 치르고도 아직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한 지사가 3명이나 있다. 보훈처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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