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용
김한용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8.09.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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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를 말하다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우리나라에 광고사진이 처음 시작된 것은 8·15 광복 후 14년의 세월이 흐른 1959년이었다. 일제 압박에서 벗어났지만 좌·우익의 격돌과 6·25 동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 땅의 경제는 앞이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광고사진도 생소했다.

5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사진기자였던 김한용(35) 서울 충무로에 광고사진촬영소를 열었다. 1924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한문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홉 살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겪는다. 그가 여덟 살에 어머니와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여 봉천제일공업학교에 입학, 봉천성방화포스터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에 자신감을 느꼈다.

19세에 백러시아인 화가에게 5년간 구겨진 신문만 그리는 수업을 받았고, 분필로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는 중국인 화가를 만나 주입식 교육을 받았으나 일본의 강제징집으로 군에 입대하면서 화가의 꿈을 접었다. 1934년 소·만국경지대 호림에 있는 712부대와 일본에서 근무하다가 광복 후 귀국한 그는 화가의 꿈을 되살리고자 했다. 하지만 이름있는 화가가 되려면 서울로 와야 할 것 같아 3·8선을 넘다가 인민군에게 갖고 있던 재산을 모두 빼앗기는 신세가 됐다.

1947년 을지로 3가에 있는 국제보도연맹 사진기자가 되면서 새로운 예술인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사진 저널리스트로서의 보도사진과 6·25전쟁 종군 보도사진을 찍었다. 재산 제1호로 여기던 미술도구를 팔아 생긴 50만환으로 롤라이코드 U형 카메라를 사고, 첫 기념으로 어머니 얼굴을 찍어 그동안 자신을 키워주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가 두 번째 카메라 라이카 3F를 산 것은 부산일보 사진기자로 재직할 때였다. 이때 사진가 임응식을 만났고 대한사진예술연구회에 참여해 작품활동에 매진했다. 1954년 일본 아사히신문주최 살롱아루스에 응모해 입선한 것이 부산국제시장을 찍은 `화염과 흑염'이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국제보도연맹 사진부장으로 있다가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실직자가 되었다. 당시 사진재료가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아 사진현상 등 모든 작업이 활발치 못하던 때에 그는 감히 광고사진을 찍겠다며 사무실을 열었다. 그것이 오늘의 `김한용사진연구소'이다. 기쁨도 잠시, 도무지 일감이 없어 파리만 날렸고 집세가 6개월이나 밀리면서 육군본부 대외육군홍보촬영과 영화 스틸 등 사진과 관련한 일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하였다.

1960년이 되면서 경제가 서서히 풀리자 제약회사 등에서 광고사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OB맥주 캘린더사진, 월간 여원(女苑) 표지사진이 계약됐고, 비락우유 제품사진까지 맡게 되어 수입이 제법 늘어났다. 영화배우라면 그의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당연한듯했다. 당시 캘린더 원고 1장에 3천환을 인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문을 연 지 5년 후 불편했던 스튜디오를 벗어나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을 사들였다.

그렇게 광고사진에 관한 명성은 널리 알려졌고, 그의 결심대로 40세인 1973년 지금의 자리에 `사진 찍는 집 김한용사진연구소'를 새롭게 건축해 영원한 광고사진 도장의 꿈을 이루었다. 사진인으로서 신조가 있다면 모델은 사진촬영 전날 섹스와 술을 일절 금해야 하며, 목욕도 필수라고 말한다. 이를 먼저 실천하는 것은 물론 벌레 등 어떠한 미생물의 생명도 중히 여겨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지난 30여 년간 찍은 주옥같은 사진들이 그의 사무실 천정, 벽, 바닥, 현관, 문과 심지어 화장실까지 빼곡하게 붙어 있다. 그의 삶은 하늘에 있지만, 원로 광고사진가의 인생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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