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역사의 축소판 봉명동유적
청주 역사의 축소판 봉명동유적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9.3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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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 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98년 8월부터 1999년 7월까지 1년간 청주 봉명·신봉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지구(1,001,840㎡)내에서 문화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은 청주시 봉명동, 신봉동, 송절동, 송정동 등 4개 동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유적이름은 시·군명+행정동(리)명+(자연부락명)+유적종류의 원칙을 따른다. 그런데 이곳은 4개 동에 걸쳐 유적이 분포하고, 동쪽으로는 “신봉동 백제고분군”이, 서쪽으로는 “송절동 고분군”이 있어 유적이름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유적이 봉명동 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인접한 다른 유적이름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조사단 회의를 거쳐 이곳의 전체 유적을 한데 묶어 “청주 봉명동유적”이라 했다.

봉명동 유적은 청주의 젖줄인 무심천을 끼고 솟은 명심산(해발 100m) 정상과 경사면에 넓게 분포한다. 완만한 구릉을 따라 등산로가 있다. 수많은 사람이 오르내리며 다져진 등산로 아래에서 신라시대 돌덧널무덤[石槨墓], 마한~백제시대의 집자리,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삶 자취가 확인되었다. 시간의 쌓임에 비례하여 이 지역에서 생성, 소멸한 역사가 덧쌓여 있었다. 이곳에 처음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은 무심천 가에 흩어져 있는 자갈돌을 주워 주먹 찌르게, 찍게, 여러면석기, 긁개, 몸돌 등의 뗀석기를 만들고 살림을 꾸려갔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이다.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전 중기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흔적이다. 당시까지 청주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 흔적이다.

완만한 구릉 끝자락에서는 약 5천 년 전에 정착하여 농사짓기를 하며 삶을 꾸려갔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살림터가 찾아졌다. 구릉 정상부와 사면 윗부분에서는 네모꼴과 둥근 움집 40동을 짓고 비교적 큰 마을을 이루어 농경문화를 확산시켜 나갔던 청동기시대 사람들 삶의 자취가 남아 있다. 원삼국~백제시대에는 집자리와 움무덤, 독무덤, 목책시설 등 삶과 죽음, 방어시설 관련 유구 260여 기가 조사되었다. 그 중 대부분이 당시 사람들이 매장된 무덤이다. 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대길(大吉)”명 청동방울은 마한의 문자유물로는 유일한 자료로서 이 지역에 기반을 둔 마한세력이 한(漢) 또는 낙랑지역과의 문화적 교류를 시사하고 있다. 또한 다양한 마구류는 백제 초기 기승문화(騎乘文化)의 이해와 백제의 고대국가 형성과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신라시대 유구로는 돌덧널무덤 7기가 조사되었고, 고려~조선시대에는 집자리, 움무덤, 기와가마, 숯가마, 분청사기 가마 등 생산과 주거, 매장유구 180여기가 조사되었다.

이처럼 봉명동유적은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 지역에서 역사발달과정상 단절 없이 시대별 문화적 특징을 지닌 유구 및 유물이 존재한다. 또한, 생활·매장·생산 및 방어시설 등 다양한 유형의 유구들이 조사되어 청주역사의 발달과정을 시대별로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치 청주 역사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이 유적은 입지상 접근성이 좋고, 청주고인쇄박물관과 인접되어 있으며,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청주역사를 통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성을 담고 있어, 역사문화공간으로서의 최적지라 판단되어 발굴 기간에 유적 보존 및 박물관 건립을 꾸준하게 제기하였다. 그러나 어느 것도 실현된 것은 없다. 돌이켜 보면 이곳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더라면 그 자체가 청주역사박물관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고, 청주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담은 큰 그릇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주거 및 상업지역으로 개발된 상태이다. 청주의 젖줄, 무심천변에 5만 년 전부터 청주 역사의 발전상을 간직했던 그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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