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자는 말이 없다
아는 자는 말이 없다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18.09.27 18:4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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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노자께서 말했다./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나는 너무 덤볐고/시끄러웠다.”

천상병 시인의 `불혹의 추석'이라는 시 앞부분이다. 천상병 시인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바 있으며,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자신의 시 제목처럼 1993년 귀천(歸天)했다.

천상병 시인이 40세가 되던 해 가을 `불혹의 추석'이란 시에서 언급한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하다'는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 `知者不言(지자불언) 言者不知(언자부지)'를 인용한 것으로,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지자불언 언자부지'라는 노자의 가르침은 開口卽錯(개구즉착), 즉 입만 열면 어긋난다는 선가(禪家)의 가르침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수심결'을 저술한 고려 중기의 보조 국사가 설파한 `但知不會(단지불회) 是卽見性(시즉견성)', 즉 `다만 알지 못할 줄 아는 것이 견성'이라는 가르침 및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종종 말했으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아는 것 자체가 진실한 앎을 얻는 근원'이라고 강조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와도 그 근본적 의미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노자 도덕경의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구절을, 입을 열면 어긋난다거나 알지 못할 줄 아는 무지의 지가 의미하는 바처럼,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인 주객(主客)이 일체(一體)된 형이상학적 차원의 가르침으로 극한 시킬 필요는 없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얼마든지 선용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단순 명료한 가르침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천상병 시인이 나이 40이 되던 해 추석에 `그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해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고 고백한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피부에 닿으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아는 자는 무엇을 알고 있기에 말이 없는 것이고, 말하는 자는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기에 말을 한 것인가? 조금만 궁리하면 `지자불언 언자부지'의 형이하학적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말이 없는 자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이고, 말하는 자는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너무 덤비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지자불언 언자부지'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겉만 그럴듯한 번지르르한 말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 보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말하지 않는 것이 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이다.

단 한 순간도 모른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그럴듯한 말을 꾸며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을 모르는지 잘 알아서, 모르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것이 성공적 삶을 담보해 내는 지름길이다. 이 같은 까닭에 공자님은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고 역설하신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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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정 2018-10-04 09:23:25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