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복습
인생 복습
  •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09.26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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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복습이다. 인생에는 도돌이표가 없다고 했는데 예외가 있나 보다. 이십 대 후반에 남매를 낳아 곧바로 삶의 현장에 뛰어든 결과는 매일 전쟁을 치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둘 다 잘 모르니 좌충우돌, 천방지축이었다. 책이나 주변에서 들려주는 따끈한 조언도 시행착오를 겪기 전까지는 그저 이론에 불과했다. 애들의 자라는 과정이 곧 내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실전을 거치며 배운 육아법을 34년이 지난 요즘,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다.

딸이 쌍둥이 딸을 낳았다. 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딸이 단번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아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다. 딸네 집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아내는 `팔이야 허리야' 온갖 엄살을 떨다가도 손녀들 앞에 가면 거짓말처럼 멀쩡하다. 어디서 저런 힘과 인내가 나올까 싶다.

이제 첫돌이 막 지났는데 신기하게도 쌍둥이 중 큰 애는 사위를, 작은 애는 딸을 빼다 박았다. 겉모습뿐 아니라 성격도 그대로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들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도록 예정되나 보다. 요즘엔 애들의 눈치가 여간이 아니어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한다. 큰애를 안아주면 작은애가 괜히 심술을 부리거나 칭얼대고, 작은 애가 울면 큰애는 잘 놀다가도 더 큰 소리로 울어댄다. 어떻게 해야 사랑을 더 받고 보살핌을 받는 것인지 벌써 알아차린 것 같다. 꾸중을 하면 누가 자기를 편들어 줄 것인지 찾을 줄도 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자매간에도 생존경쟁의 본능이 작용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엊그제부터 딸은 육아휴직이 끝나 회사에 복직하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고 책상 위에 아기들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할 텐데 잘 넘기고 있는 것 같다. 아내는 중간 중간 애들이 밥을 얼마만큼 먹었느니, 잠을 어떻게 잤느니 자세하게 현지 상황을 메시지와 동영상으로 딸에게 보고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애들이 엄마를 안 찾고 잘 놀고 있다는 뜻이지만 너희 못지않게 잘 돌보고 있다는 일종의 과시도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요즘 젊은 엄마 아빠의 육아법은 훨씬 이성적이고 세심하다. 육아에 사용되는 다양한 물품들이 다루기 어려워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기 돌보는 모습은 그들의 눈에 어설프게 보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애지중지 길러준 부모인데도 자신의 애들을 맡기기는 불안한 것이다. 몇십 년의 경험과 노하우도 그들에겐 구시대의 관습일 뿐이다.

“할머니 이론(Grandmother Hypothesis)”이란 것이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할머니의 `지적(知的)대물림'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인생 후반에 신체적 기능이 떨어지게 되면 엄마, 아빠를 대신해 할머니가 손자를 키우게 된다. 이때 축적된 삶의 경험과 지혜가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전수되고 유전자에 기록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다고 한다.

나도 어렸을 적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세 살이 되자마자 어머니의 젖가슴은 동생에게 빼앗기고 할머니 품에서 자고 놀아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할머니는 비과학적이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리고 돌아가신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은 가슴 저변에 살아있다. 주름지고 투박했지만, 할머니의 손은 늘 나를 위해 기도하는 손이었고, 아픈 곳을 낫게 해주는 약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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